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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12. 동악의 주인

 탈해는 동쪽에서 새 해가 떠오를 때마다 쑥쑥 자랐다. 탈해보다 서너 살 많았던 아이들도 한 달 남짓이면 탈해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보는 것마다 금방 익히고 배웠다. 밤이면 별자리를 읽을 줄 알고, 글자를 배워 책을 볼 수 있었다.  


 탈해는 열세 살 난 큰발이와 금방 키가 같아졌다. 큰발이는 구용의 가장 큰 아들이었다. 큰발이는 태어날 때, 머리가 아닌 발부터 세상에 '쑥' 하고 내밀었다고 한다. 탈해는 큰발이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나랑 친구가 될래?"

 큰발이는 얼떨결에 탈해의 손을 잡았다. 다른 아이들은 탈해를 슬슬 피했지만 큰발이는 그러지 않았다. 큰발이와 친구가 된 날부터, 탈해는 쑥쑥 크는 것을 멈췄다. 둘은 온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이렇게 싸돌아다니기만 해서 어떻게 하냐? 창던지기 연습을 안 하려면 밧줄 던지기라도 한 번 해봐라."

 탈해와 큰발이가 막 나오려는데 집으로 들어서는 구용과 딱 마주쳤다. 구용의 손에는 사냥용 밧줄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구용이 밧줄을 하나씩 던져주었다. 나무껍질을 솜씨 좋게 꼰 것을 보니 역시 구용의 솜씨다웠다. 


 땅 어머니의 자손들은 열세 살이 되면 첫 사냥에 나서야 한다. 어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사냥에 성공하면 밤나들이를 허락받는 것이다. 큰발이는 사냥에 재주가 있었다. 산에 들어가면 마치 펄펄 날듯이 뛰어다녔다. 좀 더 자라면 사로국에서 손꼽히는 사냥꾼이 될 것이다. 


 "탈해야, 우리 동악으로 가자."

 울창했던 숲은 아직 헐벗고 있었지만 봄의 기운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얼어붙은 땅 속 깊은 곳에서 작은 씨앗들이 몸을 들썩이는 기운이 느껴졌다. 탈해는 동악을 향해 달리며 숲의 향기와 바람과 햇빛을 하나하나 새겼다. 


 탈해는 작은 돌 하나를 들어 숲을 향해 조심스럽게 던졌다. 큰발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잠들어 있는 숲을 깨우는 거야."

 탈해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탈해가 숲에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탈해는 새소리를 흉내 내기도 하고, 나무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기도 했다. 탈해의 머리 위로 오색구름이 흘러왔다. 탈해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오색구름은 계속 탈해의 머리 위를 따라다녔다. 


 "나무가 뭐하고 하긴 해?"

 큰발이도 탈해가 하는 대로 따라 했다. 하지만 아무 느낌이 없었다. 

 "너는 아직 사냥꾼이 되려면 멀었다는데."

 "에이, 거짓말."

 "진짜래두." 

 큰발이가 탈해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너른 길 대신 좁다란 오솔길을 택했다. 마른 나뭇가지와 풀들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큰발이가 잠시 멈춰서 손가락에 끝에 침을 발랐다. 손가락을 세우고 바람의 방향을 찾아보았다. 바람이 부는 쪽이 차갑게 느껴졌다. 큰발이가 북서쪽을 가리키자 탈해가 바람의 방향을 등지고 섰다. 영리한 짐승들이 탈해와 큰발이의 냄새를 먼저 맡게 하면 안 되었다. 


 탈해는 신경을 집중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가에 짐승의 발자국이 있는지, 나뭇가지에 걸린 털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큰발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땅바닥을 살펴보았다.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새롭게 난 발자국이 눈에 띄었다. 이제 막 지나갔는지 부드러운 흙이 깊게 패어 있었다. 

 "수사슴인 것 같아. 이쪽으로 가면 샘이 있어. 한 번 따라가 보자."

 둘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큰발이가 탈해에게 속삭였다. 

 "저기 좀 봐."

 서른 걸음쯤 떨어진 곳에 사슴이 덤불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덤불 오른쪽에는 높은 바위가 불쑥 솟아 있었다. 그쪽으로는 사슴이 달아날 길이 없어 보였다. 큰발이가 속삭였다. 

 "내가 왼쪽으로 가서 밧줄을 던질게. 넌 혹시 모르니깐 아래쪽으로 가있어."

 큰발이는 사슴 쪽으로 성큼성큼 달려갔다. 사슴은 겁먹은 눈동자를 깜박거리더니 순식간에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큰발이가 재빨리 밧줄을 던졌다. 하지만 예민한 짐승은 밧줄을 피해 달아났다. 


 사슴은 바위와 탈해 사이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몸을 돌려 탈해에게 달려왔다. 바로 눈앞에 커다란 몸집의 사슴이 탈해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탈해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탈해야, 잡아. 네 쪽으로 간다."

 탈해는 제 쪽으로 달려오는 사슴의 점박 무늬를 보았다. 사슴의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탈해는 손을 뻗어 사슴을 덮쳤다. 거칠고 뜨거운 김이 탈해의 목에 느껴졌다. 무거운  사슴이 탈해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요동을 쳤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탈해는 고개를 돌리다 사슴의 맑은 눈동자를 보았다. 사슴의 눈동자 속에 탈해의 모습이 비쳤다. 그 순간이었다. 탈해는 이마 한가운데가 뜨거워졌다. 누군가의 손이 이마에 올려진 듯한 기분이 들더니 몸이 '붕'하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큰발이의 모습도 보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신만이 다른 세상으로 떨어져 있는 듯했다. 주위가 빙빙 돌면서 귀가 먹먹해졌다. 

 "동악의 주인이 오셨군요."

 사슴이 탈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탈해는 깜짝 놀라 손을 풀었다. 순식간에 사슴은 탈해의 품을 벗어나 깡충거리며 달려 나갔다.


 "탈해야, 잡아." 

 큰발이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탈해는 다리에 힘을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사슴이 뒷발로 걷어차기라고 한 거야?"

 큰발이가 물었지만 탈해는 방금 전 자신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큰발이가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돌아온 탈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슴이 한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동악의 주인이라고? 멀리 용성국에서 온 내가?'

 사로국 백성들에게 동악은 특별한 곳이었다. 신목이 땅 어머니의 품이라면 동악은 넓고 깊은 아버지 같은 산이었다. 탈해는 동악과 자신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탈해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훤하게 떠오른 달이 마당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맨발로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건 아효 공주잖아?"

 아효 공주가 잠자리 옷을 입은 채로 바닷가를 향해 뛰어나가고 있었다. 흑흑거리는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탈해는 얼른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아효 공주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고통에 찬 그 목소리가 탈해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아효 공주는 신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신목이시여. 저를 이 고통 속에서 꺼내주세요. "

 아효 공주는 신목을 붙들고 몸부림을 쳤다. 신목에서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꼭 달라붙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있자, 누군가 자신을 채찍으로 치는 것 같았던 고통이 조금씩 사그라졌다. 귀에서 웅얼거리던 죽은 자의 목소리도 조금씩 작아졌다. 


 탈해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효 공주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탈해는 아효 공주의 어깨에 손을 대 보았다. 아효 공주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탈해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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