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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13. 탈해, 불을 일으키다

 아효 공주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같은 집에 산다고 해도 얼굴을 마주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탈해는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와 큰발이와 노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효 공주는 사당 깊숙한 곳에 머물며, 기도를 드리는 일이 많았다. 


 아효 공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탈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탈해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 아효 공주의 귓가에 혁거세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악의 주인을 맞으라.”

 시조의 제사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아효 공주가 탈해를 향해 절을 했다.

 "이제야 오셨습니까?"

 당황한 탈해가 두 손을 저으며 아효 공주를 말렸다. 얼결에 두 사람의 손이 부딪쳤다. 탈해는 불에라도 닿은 듯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아효 공주가 탈해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사슴을 만났을 때처럼 공중으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탈해는 어지러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왜들 밖에 나와 있는 것이냐?"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의선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의선부인은 탈해와 아효 공주 사이에 섰다. 


 "탈해야, 괜찮은 것이냐?"

 의선 부인은 탈해의 얼굴을 살펴보며 말했다. 탈해의 이마에서 

 "혁거세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어요. 동악의 주인이 바로 탈해예요."

 아효 공주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효 공주, 청동 거울을 가지고 와 보세요."

 아효 공주가 붉은 천에 쌓인 청동 거울을 가지고 왔다. 천천히 천을 벗기자 청동 거울이 빛을 냈다. 솜씨 좋은 청동 대장장이는 둥글고 가는 원을 촘촘하게 그어놓았다. 의선 부인은 거울에 손을 대고 기도를 올렸다.


 "땅 어머니시여! 탈해의 길을 보여 주십시오."

 의선 부인은 청동 거울을 들고 쪽을 바라보게 했다. 탈해의 집 주위에 금빛 원이 그려졌다. 아효 공주가 탈해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잠시 식었던 이마의 열기가 더 심해지지 시작했다. 탈해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저앉았다. 이마에서 땀이 흐르면서 눈빛이 흘려졌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졌다. 탈해의 눈빛이 흐려졌다. 

 한참만에 의선 부인이 탈해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탈해는 청동 거울을 내려다보았다. 청동 거울 속에는 숯과 숫돌의 모습이 보였다. 


 "이 물건들이 너의 운명을 알려주는 것 같구나." 

 탈해는 이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웠다. 의선 부인의 등 뒤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탈해는 창문이 덜컥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바람이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다.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까지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바다에서는 굶주린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탈해는 얼른 일어나 창문을 꼭 당겨 닫았다. 아직 한밤중이었다. 

 방 안에는 어둠만이 출렁거렸다. 탈해는 조심조심 집안을 둘러보았다.

 "어머니. 어디 있어요?"

 "……."


 어디에서도 의선 부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탈해는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밝혀 놓은 커다란 횃불이 바람에 미친 듯이 흔들렸다. 횃불이 흔들릴 때마자 탈해의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얼굴이 따가웠다. 탈해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겼다.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아, 탈해 일어났구나. 몸은 좀 괜찮니?" 

 탈해는 그림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아효 공주였다. 탈해의 가슴이 또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탈해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이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집 안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거야?" 

 "의선 부인께서는 신목을 보러 가셨어. 천문이 불길하다고."

 아효 공주가 탈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효 공주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탈해는 아효 공주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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