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도에선 짠내가 난다
단정하게 지내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아니, 적어도 단정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오늘 알았기 때문이다.
오로빌에 가기 전부터 마음속 한켠 무언가 모를 검은 구역이 있었다.
굳이 그곳을 '우울'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주변 아줌마들처럼 프로 우울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 영역을 우울이라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단순하게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도, 아이를 키우면서도 침대와 책상 다음으로 오래 머무는 곳이 ‘싱크대 앞’인 것 같다.
요리를 잘 하진 않지만 매일 먹고 치우고의 반복을 하다 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설거짓거리들.
설거지는 당연하지. 하다가도 나는 왜 이렇게 매일 설거지 자리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까. 하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요가와 호흡수련을 시작한 뒤부터는 ‘설거지 명상’이라 이름을 붙여가며 그곳에 머물며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단정하고 담담하게 지내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 건 오늘 점심때였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건드렸다. 나는 이번 한 주간 아이들과 많이도 싸웠다. 싸웠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서로 반박하기도 하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괴로운 순간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자기는 옳다는 거다.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고...
그러다 오늘 결정적으로 누군가가 비수 꽂히는 한마디를 했다. 나는 곧장 밀린 설거지를 하러 주방으로 갔다.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러다 잠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눈물은 여전히 흐르는데... '한동안 나는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하고 과거로 과거로 흘러가보았다. 호흡과 함께...
생각의 끝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많았다. 그러다 어제 읽은 우치다 타츠루 선생의 책 <소통하는 신체>가 떠올랐다.
‘살아남기 위한 감각의 차단’
그거였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잘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그 자체! 나는 열려있는 듯 하나 많은 부분을 차단하고 있었다.
내가 지내는 이곳이 어쩌면 폐쇄 수도원 같다고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나는 갑자기 여기에 왔고, 삶터와 친구들을 모두 놓아두고 몸만 여기로 온 것이라 여겨졌다.
우치다 선생의 말처럼 ‘액체가 될 것이냐 고체가 될 것이냐’하는 문제에서 나는 액체가 ‘되어야만’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유연한 사람이야. 하는 착각은 출발부터가 잘 못되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제 와서 생각을 해본다.
혼자가 된다는 것. 스스로 삶을 꾸려간다는 것. 쉬운 듯 하나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까?
'함께이고 싶으나 혼자이고 싶은 사람'
지난 오로빌에서 정의 내린 '나'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혼자이면 외롭고 함께 할 때는 또 힘든.
고통과 기쁨의 이중주. 두 가지 각각에 기울지만 않는다면 천상의 하모니가 되겠지?
싱크대 안에서 그릇을 일부러 더 부딪혀가며 큰소리로 설거지를 하다가 호흡과 함께 , 그리고 눈물과 함께 빠져나간 뜨거운 에고(ego)! 오랜 요가 수련으로 얻은 조그만 선물 같달까?
그 순간 기도가 나온다. 스스로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기도. 또 그분께 조잘대어보는 잔잔한 하소연의 기도.
내가 설거지 자리에서 하던 것이 설거지 명상이라 했던가. 오늘부터는 이 자리를 ‘설거지 기도 자리’라고 해야하겠다.
나만의 기도 장소가 싱크대 앞이라니.
이런 어긋난 일치라니. 생활 밀착형 기도란 이런건가? 아줌마로 산다는 것은 싱크대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일일까?
내일 또 설거지를 하겠지만 또 기도를 할 것이다. 짠 내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곁에 두고. 내 마음 검은 구역을 청소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