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이 주는 기억

by 비바리우다

내 기억은 단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다. 그 사진에서 나는 언니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가을 어느 한나절 막 추위가 오기 전, 양지바른 기와집 한 귀퉁이에서 옹기종기 서 있는 우리들은 그저 즐거운 듯 웃고 있다. 얼마 후면 사진을 찍어주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줄도 모르고 아무런 근심도 생각도 없이 말이다. 아마 그분이 말했으리라.


“스마일, 루시아, 스마일~ ”


그때 그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에게 ‘나는 이제 아주 간다’라는 말을 했을까? 오죽이나 나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으면 그 옛날(1960년대) 한국에는 카메라도 귀하고, 총천연색(컬러) 사진도 현상이 안 되던 시절에 어렵게 카메라를 구하고 사진을 찍고서는 일본에까지 가서 현상해다가 내게 주고 갔을까? 어쩌면 그 사진이 있었기에 나는 거꾸로 그분과의 기억을 오랫동안 지니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그 후 10년이 흐를 동안에도 내 유일한 컬러사진인 그 사진 속에서 나는 코를 흘려서 더러워진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 당시 나는 코를 잘 흘려서 소매가 반들반들해진 옷을 입고 다녔다. 그때는 수돗물도 없었고 빨래를 하려면 멀리 빨래터로 날라야 하기에 지금처럼 바로바로 갈아입는 것은 생각조차 못 하던 때였다. 게다가 누구나 너나없이 어린 애들은 그랬기에 서로 흉잡히지도 않던 때였다. 그러나 나의 신부님은 달랐을 거다. 미국에서 왔으니까. 그렇게 더러운 꼴은 한국에 와서야 처음 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분은 나를 멀리하지 않고 사랑해 주셨다.


그 사랑은 조그만 관심을 표현한 데서 시작되었다. 서른이 채 안 되었을 신부님은 미국 보스톤에서 한국으로 그것도 제주도로 제주도에서도 시골 성당으로 부임을 받아 오셨다. 그땐 한국 신부님이 아직 배출되지 않을 때라, 제주도에는 골롬반 선교회 소속 신부님들이 아일랜드에서 주로 발령받아 오곤 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부님은 시골 본당에 와서 신자들의 집을 방문하고 상황들을 둘러보느라고 우리 집에도 오셨다. 낮에는 밭일로 밤에는 자식들의 건사로 바쁜 어머니가 신부님께 대접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 식은 고구마만 덜렁 양푼이 속에 담겨있을 뿐이었다. 차마 부끄러워 어머니는 내밀 수 없었고 미안한 마음에 웃고 앉아 있는데, 멋 모르는 어린 내가 고구마 한 개를 신부님께 내민 것이다.


“신부님 이거 멋읍써!” 하고 말이다.


늘 아무 경계 없이 헤벌쭉 웃기 좋아하던 내 모습에 신부님은 답답한 마음이 풀렸고 웃으며 받아 드셨다고 한다. 네 살짜리 코찔찔이가 내민 고구마를!


그 고구마 덕분인지, 내 웃음 덕분인지 신부님은 단박에 나를 좋아하셨고 나를 기억하게 되었다. 마침 성당은 우리 집에 바로 붙어있어서 나는 심심하면 신부님께 놀러 갔었고 신부님도 예고 없이 우리 집에 찾아오시기도 했다 한다. 그 옛날엔 전화가 없었으니까. 있다고 하더라도 전화 거는 일은 매우 귀했으니까.


“루시 아~, 루시 아~ 있어?”


한 옥타브 높은 음성으로 부르면서 말이다. 그러면 나는 마루로 쪼르르 달려 나가 그길로 신부님과 성당으로 놀러 가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내겐 소중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당시 나는 네 살짜리 어린애라, 세월이 흐르면서 그저 가끔 흐릿하게 수선화가 떠오르고 성당 마당이 떠오르고 신부님의 등에 바짝 붙어서 달리던 자전거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얼핏 그런 영상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마음이 따뜻해져서 나도 모르게 잔잔히 미소 짓곤 했었다. 그러다 언니를 통해 신부님과 만났던 당시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왜 마냥 고향의 성당 마당을 헤집고 다니고 싶은지, 로만 칼라의 검은 신부복을 보면 왜 달려가 끌어안고 싶은지, 왜 수선화가 나에게는 애잔하고 그리운 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사진을 보면, 어릴 적 내 모습과 함께 신부님의 온전한 사랑의 기억도 온다. 그러면 나는 행복감으로 차오른다. 몽글몽글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단단하게 내 가슴을 채워주는, 행복이라는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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