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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Dec 14. 2021

이틀만 있어봐, 괜찮아질꺼야

혁이 엄마를 그리워하며

  출산 휴가가 끝나고 학교에 돌아갈 무렵 아기 돌보미로 혁이 엄마를 소개받았다. 우선 면접을 보았다. 두껍게 쌍꺼풀이 진 눈은 물기를 많이 머금고 있었다. 집도 우리 집과 가깝고 나이도 적당하고 적극적으로 일할 의지도 있어서 65만원(2000년)에 아가를 돌보면서 짬짬이 살림도 해주기로 계약하였다.


  나는 혁이엄마 덕분에 퇴근 후 집안일을 신경 쓰지 않고 편안히 생활할 수 있었다. 마음이 넉넉해서 시어머니가 아기를 보러 와서 눌러앉아도, 싫다는 내색 없이 점심도 같이해 먹으면서 돈독하게 잘 지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살림도 얼마나 야무진지 허투루 새어나가는 게 없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쓰레기를 모아놓은 곳에서 더러 비어 있는 게 있으면, 그것을 자기 집으로 가져다가 마저 채워서 버린다고 할 만큼 짠순이이기도 했다.

  혁이는 2학년, 우리 첫째보다 세 살 아래였다. 아직 엄마 손이 많이 필요로 하는 때라, 아빠가 없을 때면 하교 후 우리 집에 와서 공부했다. 어려서 그런 건지 책보다 주변에 관심이 많았다. 큰애의 물건을 만져서 큰애와 다툼을 하는 것이 나와 혁이 엄마 사이의 풀어야 할 숙제가 되곤 했다.


  그렇게 둘째를 돌보던 6개월이 지날 즈음, 어느 날 퇴근을 해보니 집에 사람이 없었다. 혁이도, 둘째도, 혁이 엄마도. 혁이 엄마에게 전화를 해보니,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왔는데 혁이아빠가 둘째를 돌보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께름칙한 마음에 그 집으로 달려갔다. 혁이 아빠는 딸기를 갈아서 요구르트와 섞어 둘째에게 먹이고 있었다. 둘째는 아저씨가 챙겨주는 퓨전 이유식을 맛있게 얻어먹고 있었다. 안도와 감사를 동시에 느끼며 둘째를 안고 돌아왔다. 


  그날 혁이 엄마는 야쿠르트 지사에 면접을 보러 갔던 거였다. 그녀는 원하던 대로 야쿠르트 아줌마가 되었다. 나는 새로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쉽지 않아 일단 고모에게 아기를 맡겼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새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혁이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 혁이 아빠가 죽었어요.”


  나는 이게 무슨 거짓말인가? 싶었다. 혁이 아빠는 대형버스 운전사였는데 일 없는 날이면 집에서 술을 마시기 좋아했다. 게다가 사람이 흙을 좋아해서 연립 옥상에다 화분을 만들고 상추며 고추며 깻잎 등을 심어 놓았다. 그날도 술을 마시고 3층 옥상에 올라가 경사진 곳에서 졸았나 보았다. 그러다 거꾸로 떨어지면서 뇌를 다친 것이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혁이 아빠를 보내고 나서도 혁이 엄마는 야쿠르트 일을 계속하였다. 가끔 동네를 돌다가 우리 집 앞을 지날 때면 우리는 길바닥에 서서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내게 야쿠르트를 내밀면서 힘든 삶을 얘기하곤 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얘기를 듣다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도 학교와 집을 오가는 삶에 허덕대고 있었다. 게다가 그 당시에 학부모가 교감을 통하여 담임인 나를 좌지우지하려고 해서 힘들었다. 그래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그녀에게 하소연을 했다. 내 얘기를 듣고서 그녀는 미소지으며 말하곤 했다. 


  “언니, 이틀만 있어 봐. 괜찮아질꺼야. ”


  ‘이틀만’은 당장 효력을 나타냈다. 그녀에게 터놓고 나면, 우선 애끓던 속이 조금은 편안해지곤 하였다. 내게 있어서 터놓는다는 것은 마음의 상처로 생긴 고름을 안전하게 짜버리는 거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좋은 친구였다고나 할까. 그렇게 짧게나마 삶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헤어질 때가 되면, 함께 힘차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러면 나는 일할 기운이 생겼다.


  그녀는 혼자서도 씩씩하게 혁이를 키워냈다. 그러면서 돈도 제법 은행에 저금해놓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좋았다. 나보다 언니 같았다. 생활력도 강하고 살림도 잘하고 야무진 그녀가 나는 존경스러웠다.  


  그 후 혁이 엄마는 야쿠르트 다니는 것만으로는 혁이를 키워내는 게 부족했다고 생각했나 보았다. 새벽녘까지 서빙하는 돼지갈비집에 취직을 했다. 열심히만 하면 한 달에 300만원 가까이 가져갈 수 있다고 했다. 그 얘길 들으며 그렇다면 아이 교육은 어찌하나? 속으로 생각했다.


  2년 후 우리는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서로 집이 멀어지다 보니 안부를 묻는 일이 힘들어졌다. 그러면서 혁이 엄마는 서서히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무렵 인덕원역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스레 마음이 울적한 날이었다. 그런데 마침 길을 걸어오는 혁이 엄마를 우연히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반갑게 혁이 엄마를 불러세웠다.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게다가 그녀의 느닷없는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언니, 내 재산 8000만원을 계주한테 당했어요. 여기 인덕원에서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먹고 날라 버렸어요..” (그 당시 1억이면 평촌 신도시에 15평 아파트를 사고도 남는 큰돈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절약하며 살던 혁이엄마가 사기꾼의 말에 속아 전 재산을 날린 거였다. 재산만 날린 게 아니라 믿음에 대한 배신으로 생긴 상처일까? 생기가 빠져나간 듯, 어딘가 삭막하게 느껴졌다. 나는 가슴만 답답하게 조여왔다. 뭔가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밥이나 같이 먹자는 내 얘기에, 혁이 엄마는 일하러 가야 한다며 종종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그냥 떠나간 그녀가 아쉬웠다. 밥은 그냥 밥만은 아니었건만. 뜨끈한 국물을 같이 먹을 때가 오면, 전처럼 얘기를 나누며 삶의 서러움도 나누기를 바랬건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외로움을 나누는 것도 삶의 궤적이 같아야 하는 거였을까? 내가 자주 연락했더라면 그녀의 억울함, 외로움, 삶의 피곤함을 함께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위로를 받았으리라. 그녀가 밤낮없이 일을 한다고 무심히 놓아버렸던 것이 무척 후회가 됐다. 좋은 친구는 그만큼 공들였어야 했건만!


  공연히 더 허기가 졌다. 밥을 먹어도 맥주를 마셔도 속은 풀리지 않았다. 그저 함께 손을 흔들었던 순간이 그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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