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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Jan 26. 2022

성당 앞 계단

- 로츠신부님을 추억하며 -

  내게는 어슴푸레 하지만 안온함과 따스함을 주는 기억에 남는 자리가 있다. 성당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성당이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맨 처음 떠오르는 기억은, 마룻바닥이라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성당의 모습이다. 커다란 방 같은 곳이라 신발을 벗고 들어앉았는데 무슨 기도를 했는지 모르지만, 어머니와 동네 어른들은 오래도록 중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 옆구리에 붙어 앉아서 그 소리를 듣다가 졸다가 누워 자곤 했다. 그때 내게 성당이란 곳은 무척 지루하고 불편한 장소였다.


  그러다가 좀 더 자랐을 무렵엔 성당의 담벼락에서 활동사진을 신기하게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아일랜드에서 오신 신부님이 본국에서 헌금을 모아 예쁜 성당을 지으면서 성당 한쪽 테니스장에 하얗게 칠한 벽을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서 신부님은 신자들을 모아놓고 더러 영화를 상영했다. 


  깜깜했던 밤, 흰 벽을 배경으로 영사기의 불빛이 살아나고 철그덕 거리며 돌아가던 영사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우리는 삼삼오오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나병 환자를 위해 애쓰시던 다미안 신부님의 일대기를 보았다. 나병에 문드러진 환자의 손을 잡는 다미안 신부님의 모습이 흐릿한 환영처럼 떠올라온다. 더듬거리며 설명하는 서양 신부님의 목소리와 더불어. 


  내 기억의 하이라이트는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오신 로츠 신부님과의 추억이다. 당시 우리 성당에 발령받아 오신 신부님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가정방문을 하셨나 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서른 살 청년이었던 신부님은 향수병을 앓고 계셨다. 낯선 타국생활에다 음식도 맞지 않아 힘든데도 신부님은 시골집들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의 상황을 챙기셨나 보다. (성당의 식복사인 동네 아주머니가 할 수 있는 음식은 된장찌개나 김치 볶음이었다. 고향 음식이 그리운 신부님이 해결할 길은 겨우 통조림이 전부였으니 오죽했을까.)   


  신부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셨을 때 어머니가 삶은 감자를 내오셨다. 시골인데다 올망졸망한 여섯 아이를 거느려서 바쁘신 어머니가 대접할 게 그것밖에는 없었던 거다. 껍질째 삶아서 누리끼리한 감자가 소쿠리에 들어있는 게 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신부님, 드십써(드세요)”     


  콧물로 반들반들해진 옷 소매인 채로 내가 웃으며 감자를 내밀었다고 한다. 그때 내 나이가 네 살이었다. 큰 언니가 전해준 얘기라 내겐 그 기억이 없지만, 그때부터 신부님이 나를 예뻐하고 사랑해주셨던 것 같다. 


  당시 신창성당은 뾰족지붕에다 높다란 종탑이 있었고 앞면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동상이 지붕에 서 있는 웅장한 모습이었다. 성당으로 들어가려면 많은 계단을 올라야 했고 성당 안뜰은 매우 넓어서 꽃과 나무며 잔디와 이름 모를 풀들로 가득하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저녁놀과 더불어 하얀 수선화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뿜는 향기였다.


  어느 때인가, 로츠 신부님과 성당 앞 계단에 앉아있었다. 신부님은 나에게 차를 가리키며 ‘car’ 혹은 ‘taxi’ 뭐 이런 단어를 천천히 여러 번 반복하셔서 말씀해주셨다. 개는 ‘dog’라는 것도. 


  성당에서 5분 거리가 우리 집인지라 그런지 어떤 날은 신부님이 일부러 나를 찾아오셨다.

  “루시아~”

  마치 성악을 하듯 큰 소리로 부르면서 대문을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신부님을 따라 성당으로 놀러 갔다. 나는 로츠 신부님께 종알종알 우리말을 했고 신부님은 그런 내가 귀여운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맛있는 사탕 같은 것을 주셨다. 한참을 신부님과 놀고 나면 나 혼자서 성당 안뜰 이곳저곳을 신나게 휘저어 다녔던 것 같다. 늦은 6시 성당 종소리가 들리면 나는 저녁을 먹으려고 성당 가까이에 있는 우리 집까지 부지런히 내달리곤 하였는데, 그때가 더 나이가 들었을지도 모르건만 나는 로츠신부님과 즐거웠던 때로만 기억하고 싶어진다.


  아마 나는 눈을 뜨면 신부님을 만나러 성당으로 달려가곤 했을 것이다. 신부님과 차를 타고 이시돌 병원으로 갔다 오던 일, 그럴 때마다 차창 밖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지나가던 일, 성당 앞 계단에서 신부님께 열심히 재잘대던 일 등을 생각해볼 때. 그런 어린 꼬맹이를 귀찮게 생각지 않고 나를 귀여워 해주고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오신 지 2년도 되기 전에, 우울증이 심각해지자 신부님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신부님은 나를 사랑하셨고 가난한 집 막내딸인 내 처지를 동정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께 나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공부시켜주겠노라고 하셨던 걸 보면. 어머니의 거절로 불가능하게 되자 신부님은 나를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어렸을 적 유일한 가족사진이자 컬러 사진이 그것인데, 사진 속의 나는 신부님과 헤어지는 줄도 모르고 활짝 웃고만 있다.   

   

  어른이 되면서도 성당은 내게 가슴속 따뜻한 공간이었다.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신부님을 그리워했었고 신부님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18년 내가 이시돌 피정을 가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아일랜드 신부님을 만났다. 80이 넘은 늙으신 신부님이라, 혹시나 해서 1960년대 상황을 물었고 신부님이 그 당시를 알고 계셨다. 


  우여곡절 끝에 그 신부님을 통해 나의 신부님을 찾다 보니 제주에서 활동하던 신부님들은 성골롬반회 소속 신부님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 내가 찾던 신부님이 로츠신부님이라는 것과 그분이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사셨다는 것도. 게다가 오래전에 미국으로 돌아간 로츠신부님은 사목활동을 하시다가 1995년에 사망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워낙 어렸을 때라 나는 신부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신부님과 성당 앞에서 얘기를 주고받았던 기억만은 가슴 속에 각인되듯이 새겨져 있다. 가족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데 어린 시절, 신부님만이 온전히 나를 사랑해주셨기에 또렷하게 새겨진 것 아닐까? 이렇듯 성당 앞 계단은 봄날 미풍을 즐기면서 떠듬떠듬 내게 설명해주던 로츠신부님을 떠올리게 한다. 그 기억만으로도 성당은 내게 행복한 기억의 자리, 완전한 사랑을 알게 해주는 자리다.     


 살아있는 동안에 나도 누군가에게 손톱만큼만이라도 그런 기억을 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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