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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Feb 27. 2021

똥 돼지 변소 이야기

“어머니, 도새기 튀어나왔수다.”

(어머니 돼지가 튀어나왔어요.)

검정 돼지가 갑자기 변소 울타리를 뚫고 달려 나와선, 온 마당과 뒤뜰까지 휩쓸고 돌아다녔다.


내가 소리를 지르자 어머니가 마당으로 달려 나오셔서 가까스로 돼지를 울안으로 몰아넣고는 한숨을 쉬셨다.

“아이고 도새기 불 볼라사켜.”

(돼지 불알을 제거해야겠다.)


숯 돼지가 발정이 나서 짝을 찾느라고 겅중대는 것이라, 어머니는 급히 동네 아저씨들을 불러 왔다. 아저씨들은 합심하여 돼지의 다리를 잡은 다음에 칼을 들고 돼지의 불알을 잘라내었다. 돼지는 온 동네가 떠나갈 만큼 꽤왜왝 비명을 질렀다. 다 끝나고 나자 아저씨들은 소주를 마셨고 며칠 동안 끙끙 앓던 돼지는 얌전하게 돌아다니게 되었다.


 우리 집 변소는 마당 구석에 돌담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제주도에서는 흔한 변소지만 육지에 사는 사람들은 잘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른다. 돌담 가장 안쪽에는 널빤지로 덮인 커다란 돼지 집이 있었고 거기엔 늘 돼지가 배를 깔고 누워있었다. 심심하면 돼지는 제집을 빠져나와 보리낭(짚)이 잔뜩 풀어 헤쳐진 울 안에서 머리를 흔들며 걸어 다녔는데 그렇게 놀다가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었다.


  대여섯 살 즈음부터 변소로 가서 볼일을 봐야했다. 나는 새까만 똥 돼지가 무서워 먼저 변소 울타리 사이로 돼지가 제집 밖으로 나와 있나 살폈다. 돌로 만든 계단을 올라 담벼락이 쳐진 변소에 들어가면, 탄탄한 돌바닥 두 개 사이에 넓은 틈이 있었다. 그 틈은 내 발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나는 한쪽 발이 빠지지 않게 얹은 다음 두 발을 버티고 아랫도리를 내린 후 주저앉았다. 볼일을 보다가 똥 돼지가 제 식당 안으로 꿀꿀거리며 다가오면, 아랫도리를 긴장하며 돼지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그놈이 고개를 쳐들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반쯤 일어서서 돼지에게 막대기를 휘둘렀다. 


  변소에 앉아서 글 읽기 시작한 것은 여덟 살이었던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차츰 여유가 생겨 이쪽 저쪽 다리에 힘을 주면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그 당시는 두루마리 휴지라곤 없었고 종이를 구겨서 사용했기 때문에, 변소에는 항상 못 쓰는 책이나 공책 등이 있었다. 재미있는 것에 빠져들 때는 주저앉은 채 읽다가 한없이 시간이 흐르곤 했다. 어떤 내용이든 변소에서 읽는 것은 집중이 잘 되었다. 변소에 쪼그리고 앉아 한자를 보고 쓰는 시늉을 하거나 사회책을 달달 외우기도 했다. 변소에서 외우는 것은 기억도 잘 되어, 시험 때가 되면 꼭 공부할 책을 들고 가는 버릇이 생겼다. 게다가 우리 집 돌담 주변엔 논밖에 없어서 볼일을 보다 보면 돌 틈 사이로 바람이 솔솔 들어와서 엉덩이를 쓸어 말려주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까진 전기가 없어, 어두워지면 안방에 모두 모여 등피(등잔)에 불을 켰다. 변소는 깜깜했고 대신 집에는 요강이 있었다. 그러다가 비상사태가 터지는 날엔 누군가와 함께 2인 1조를 이루고 변소로 가야 했다. 방문을 나서면 칠흑같은 어둠이 마치 나를 덮칠 것처럼 무서웠다. 그럴 때면 웃가름(뒷동네) 순옥이가 발을 헛디뎌 변소 간에 빠지는 바람에 똥물을 뒤집어썼다는 얘기가 생각이 났다. 변소에서 다리를 잘못 디디는 순간 지옥에 빠질 수 있으니까, 조심히 발을 뻗치고 천천히 앉는다. 

  “빨리 나오라 게”

나를 기다리는 언니도 무서우니까 변소 바깥쪽에서 재촉한다. 볼일을 보고 엉뚱하게 빠지지 않도록 하면서 서둘러야 할 때는 정말 고역이었다. 그나마 달 밝은 밤이면 여유롭게 볼일을 볼 수 있었다. 


  완연한 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동네 아저씨께 거름 만드는 일을 부탁하셨다. 아저씨는 돼지우리에 있던 보리 짚을 날라서 변소 옆 공터에 둥글게 쌓기 시작했다. 돼지가 1년 동안 볼일 보고 발로 밟았던지라, 깔아놓았던 보리 짚은 흐물흐물하게 적당히 썩어있었다. 덕분에 이것들은 훌륭한 거름 밑천이 되었다. 거름을 만들기 위해 아저씨는 거기에다 보릿겨와 짚 등을 넣었다. 그런 다음 삽으로 위, 아래를 뒤집으며 되직하게 섞었다. 맨 나중에는 그 위를 비닐로 덮어서 오래도록 푹 삭게 두었다.


  때가 되어 시커멓게 변한 똥거름을 푸는 날, 쇠스랑으로 퍼낼 때마다 푹 삭은 그놈 안에서 굼벵이들이 엄청나게 기어 나왔다. 뭉실뭉실하고 하얀 애벌레들이 움직여 다니는 모습은 그저 징그러운 것만이 아니었다. 어떤 힘이 느껴졌다. 살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이랄까. 

  아저씨는 거름을 망탱이에 담아 리어카에 실었다. 리어카 안이 똥거름으로 가득 차면, 아저씨는 밭으로 리어카를 끌었다. 우리도 함께 밀었다. 아저씨가 밭 여기저기에 망탱이를 놓으면, 어머니와 함께 우리는 거름을 밭 두둑에 골고루 뿌렸다. 그렇게 하면 곡식들은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처럼 정말 잘 자라 올랐다. 당연히 수확물도 풍성했다.     


이렇게 똥 돼지 변소는 배설뿐 아니라 나를 먹이고 가르치고 성장시킨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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