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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Sep 22. 2021

추석을 보내며

어머님을 위하여

어머님이 싸주신 것들을 트렁크 가득 싣고 출발했다. 일찍 올라가라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머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다. "수고하셨어요. 어머님." 하고 안아드렸다.


어머님은 시집온 이후 40년을 맏며느리로 살고 계신다. 내가 결혼해서 맞은 첫 명절에 얼마나 놀랐는 줄 모른다. 열네 명이나 되는 친척들이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부터 2박 3일 동안 어머님 댁에 모여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삼시 세끼 다른 메뉴를 집에서 해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적잖이 놀랐다. 명절 음식을 한다고 모였지만 정작 음식은 거의 어머님이 해 두셨고 고작해야 전이나 부치는 게 다였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밥을 먹을 때면 아버님은 늘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우리 가족이 다 모였구나. 이렇게 화목하게 다 모여서 참 좋다."


아버님의 말씀은 시할머니의 독설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멀리서 보면 화목해 보였다. 어머님과 작은 어머님들의 사이도 좋았고, 아버님도 형제분들과 잘 지내시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님의 희생이 만들어 낸 화목이 나는 달갑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명절 음식 한다는 명목하에 연휴 전날부터 모여 어머님을 괴롭히는(?) 일이 없어졌다. 돕는 손길이 줄었으니 명절 음식을 하는 일은 오롯이 어머님의 몫이었다. 내가 돕는다고 도왔지만 티가 나지 않았다. 작은 어머니들은 명절 당일에 상을 다 차려놓으면 오셨다. 차례를 지내고 "형님. 수고하셨어요." 하며 봉투를 내밀고는 바쁘게 일어나셨다.  그나마도 이젠 코로나 때문에 근처 사시는 작은어머니 내외분만 잠깐 오셨다 가신다. 


오늘도 차례상 앞에서 아버님은 <조상님께 예를 갖추는 일>이라고 하셨다. 절을 할 때마다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셨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누구도 아버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이가 없다. 아버님은 그걸 모르시는 걸까.


차례를 없앴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편이 꺼냈다. 그동안 희생하신 어머님의 말씀을 흘려듣기 싫었다. 도련님과 동서도 같은 의견이었기에 어제 저녁을 먹으며 말씀을 드렸다. 아버님은 당황스러워하셨다. 조상님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음을, 그래서 예를 갖추는 차례를 지내는 일이 중요함을 설명하셨다. 내내 듣고 계시던 어머님이 입을 여셨다. 지난 이야기들을 하시던 어머님은 눈시울을 붉히셨다. 남편과 도련님도 각자의 의견을 말씀드렸다. 나 역시 그동안 어머님을 보며 느꼈던 것들을 말씀드렸다. 예의를 갖춰 필요한 말들을 했다.


"아버님.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어머님을 더 생각하게 돼요. 조상님들께 예를 갖추는 것도 그동안 어머님이 희생하셔서 가능했던 거지요. 어머님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아버님 말씀대로 조상님들께 예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겠지만요. 저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가족들에게 잘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결혼하고 11년간 줄곧 보아온 건 어머님이 부엌에서 음식 하시는 모습이었어요. 그런 어머님을 보면 마음이 쓰이고 죄송하고 그래요. 이젠 어머님 건강도 걱정이 되고요."


오랜 시간 여러 말들이 오갔다. 아버님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지금 당장 차례를 없앨 수는 없다고 하셨다. 결국 내년 구정까지는 지내기로 하고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늘 괜찮다고만 하시던 어머님이 괜찮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단 걸 안다. 그런 어머님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은데 앞으로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렇지만 이만큼도 많은 발전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려놓기 시작한 아버님께도 감사하다. 


다섯 시간 걸려 집에 도착했다. 어머님이 싸주신 음식으로 저녁을 차려 먹었다. 어느 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이 풍요로운 건 모두 어머님 덕분이다. 어머님이 챙겨주신 것처럼 나도 어머님을 챙겨드리고 싶다. 내년 추석은 부디 다른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어머님이 편안해지셨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우리 곁에 계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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