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닐라라떼 Sep 20. 2021

동서 이야기

그 시절 내 모습을 떠올리며


통통한 볼살을 만져보고 싶다. 볼록한 배는 또 어떻고. 기저귀 찬 귀여운 엉덩이를 하고는 바쁘게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아기의 움직임에 자연스레 눈길이 따른다. 행여나 부딪혀 넘어지거나 다칠까 봐 반사적으로 막는다. 우리 아이들이 이제 10살, 7살이 되었으니 아기를 가까이서 만져보고 바라보는 게 꽤나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다. 눈앞의 아기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도련님(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도저히 입이 안 떨어져서 여전히 도련님이라 부르고 있다.)과 동서는 아들을 낳았다. 이제 16개월이 된 아기다. 아기 조카의 행동과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 나야 워낙 아기를 좋아하니 그렇다 치지만 오늘 보니 남편도 아기 조카에게 시선을 못 떼고 있다.


"큰 아빠야~"


세상 다정한 말투를 장착하곤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다. 검지로 조심스레 아기 조카의 통통한 볼을 건드려본다. 아기 조카는 빤히 쳐다보다 인상을 찌푸리며 "잉" 하는 소리를 내고 만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보니 어느새 아기 조카도 큰 아빠가 익숙해진 모양이다. 작은 발에 야무지게 힘을 주고 서서는 큰 아빠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남편은 광대를 힘껏 올리고 조심스레 아기 조카의 볼을 만져보더니 용기 내어 볼록한 배를 쓰다듬는다. 아기 조카는 그런 큰 아빠의 손길이 싫지 않은지 "잉"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다.


남편은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의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워낙 아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고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는 마음에 여유가 없기도 했다. 그저 빨리 컸으면 했던 것 같다. 그런 남편이 아기 조카에게 관심을 보인다. 이 사람이 나이 들어 그런가. 이제 아기가 귀여워 보이나 보다. 좀 전엔 직접 말을 했다. "OO이 너무 귀여운 것 같아." 아기 조카를 보면서 생전 아기를 처음 본 듯 신기해하며 질문을 하는 남편을 보면 나 혼자 우리 아이들을 키운 것 같다. 아기 조카를 목욕시킬 때 도련님과 동서가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수씨 혼자 안고 씻기려면 힘들겠어요."라고 말하는 남편을 보는데 어이가 없다.


"아기 혼자 들어서 씻기기 힘들지. 근데 나는 혼자 다 했잖아. 자기는 맨날 늦게 오고. 기억나?"


남편은 '그랬었나?' 하는 표정을 하며 나에게 미안해했다. 뭐, 미안해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남편이 얄미워 보이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동서가 아기 조카를 키우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시절 내 모습을 떠올렸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랬는데 동서는 그에 비하면 편하지>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혼자 아기랑 있으려면 동서 힘들겠다, 맞아. 아기가 밥 잘 안 먹으면 얼마나 속상한데, 재울 때 안 자고 오래 걸리면 화나지> 하는, 동서의 마음을 이해하는 말들을 했다. 나이를 먹은 건지, 이제 숨 돌릴 만큼 아이들을 키워놔서 그런 건지 몰라도 동서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기 조카 때문에 동서는 설거지도 안 했고 전도 나 혼자 다 부쳤지만 전혀 화가 나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쓰럽고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 조카를 재우고 나와서 이미 식구들은 다 먹고 치운 밥상에 앉아 혼자 밥을 먹는 동서를 보면서 예전 생각이 났다. 아이 젖을 먹이거나 재우고 나오면 이미 식구들은 밥을 다 먹은 상황이었고, 밥 먹으라면서 다들 자리를 뜨고 밥상을 치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들 움직이고 이야기 나누고 계신 상황에 나 혼자 앉아 밥을 먹는 기분이란.. 누구 하나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 집안에서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 당시 남편도 그런 내 마음을 몰랐다. 그때 생각이 나서 동서는 밥을 편히 먹게 해주고 싶었다. 반찬과 국을 새로 퍼다 주고 먹으라고 했다. "어머님. 앉아 계세요. 다들 앉으시지요. 밥 먹을 때 돌아다니면 불편해서 못 먹어요." 했다. 어머님은 "어머. 그러니?" 하셨다. "나도 예전에 밥 먹을 때 다들 돌아다니시면 얼마나 불편했다고~"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내 말을 듣고 동서는 웃었다.


형님과 동서 사이가 된 지 이제 2년 반. 아직은 편하지 않은 사이다. 어제 시댁 내려오는 차 안에서 읽은 글동무님의 동서에 대한 글을 보면서 나는 어떤 형님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좋은 형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해주는 게 없으니 동서에게도 뭘 바라지도 말자고도 생각했다. 나 역시 빈틈이 많은 사람인데 몇 살 차이 안 나는 동서에게 형님 노릇 하지 말자 생각했다. 힘주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 같은 모습만 유지하자 생각했다. 꼭 좋은 형님이 아니어도, <우리 형님 너무 싫다. 스트레스받는다.>는 말만 안 들어도 되지 않을까.


동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자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매번 하는 설거지도, 어머님 일을 거드는 것도, 혼자 전을 부치는 것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너그러운 마음을 베푸시는 어머님의 영향인지 시댁에서 나도 조금은 너그러운 형님의 모습을 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눈도장을 찍어 그런가 잠들기 전 아기 조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녕> 하고 손을 흔들어주고 자러 들어갔다. 지난밤 모기 때문에 동서가 잠을 설쳤다 했는데 오늘 밤은 아기 조카와 편하게 잤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