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닐라라떼 Nov 05. 2021

받고 싶지 않은 전화

너 그렇게 살지 마.

전화벨이 울린다. 녀석이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녀석은 갑자기 전화를 해서는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밀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역시 뜬금없다. 교통사고가 나서 2주간 입원을 했었다는 소식을 전하던 녀석은 와이프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과장된 웃음으로 승화시켜 털어놓았다. 안쓰러웠다. 녀석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녀석의 와이프 험담을 하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번번이 녀석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돈을 잘 벌면 우리 와이프도 집에서 애들 보고 그럴 텐데. 내가 잘 못 벌어서.. 야 넌 좋겠다."

"내가 네 남편처럼 회사 다녔으면 걱정이 없었을 텐데. 야 넌 좋겠다."


또 시작이다. 입원 중에도 밀린 일을 하느라 바빴다며 신세한탄을 하던 녀석은 나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항상 하는 레퍼토리다. 지겹다. 녀석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아슬아슬한 말들을 나에게 날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내 오랜 친구다. 녀석이 싫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씩 전화를 해 내 속을 긁는 소리를 할 때면 한 대 패고 싶어 진다. 옆에 있었으면 등짝 스매싱을 날렸을 것이다. 



"야. 또 시작이냐. 난 뭐 걱정거리 없이 사는 거 같냐? 그딴 소리 할 거면 너 앞으로 전화하지 마."


녀석은 또 한 번 큰 소리로 웃었다. 내 반응을 즐기는 건지, 이런 말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건지, 알 순 없지만 녀석의 말을 나는 농담으로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형님도 그런 걱정을 하시냐? 걱정 마시라고 해."

"내년이면 작은 애 입학하잖아. 넌 다시 일할 계획 없지?"


이쯤 되면 한번 해보자는 거다. 참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계속 허허거렸다. 이 새끼를 그냥 확... !! 그래. 입원 중에 와이프가 빨리 퇴원하라고, 일하면서 애들까지 혼자 보기 힘들다고, 꾀병 부리지 말라 했다는데 그 속이 말이 아니었겠구나. 넓은 마음으로 내가 너를 이해해 주마. 애써 노력하는 나를 녀석은 자꾸만 시험했다. 이걸 그러려니 하고 가만둬야 하나, 아님 이딴 소리 다시는 못 지껄이게 확 잡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냐고. 누구나 내색하진 않지만 걱정거리들을 안고 사는 거 아니겠냐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짐을 짊어지고 살기에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거라고...  결국 나는 또 진지해졌다.



그런데 그때.


"야. 나 전화 들어온다. 내가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녀석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물론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녀석에겐 그냥 속에 있는 걸 털어놓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녀석이 떠들어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고 진지해진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다. 


내가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다 한들, 내 고민을 털어놓는다 한들 녀석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녀석의 눈엔 내가 걱정거리 하나 없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아이들 키우면서 여유 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뿐이겠지. 제 삶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줄만 아는 녀석이 참으로 딱하다. 녀석이 그렇게 살 수밖에, 그런 대우를 받고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오랜 친구란 이유 하나만으로 늘 반갑게 녀석을 받아주었는데 이젠 그만하고 싶어 진다. 부디 녀석의 전화번호를 차단하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남편의 자전거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