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였다. 100만 원, 딱 100만 원이 부족했다. 공장에 취직이나 하라는 아빠의 말에 몇 날 며칠을 울며불며 매달려 간 대학이었다. 방학이면 공장에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등록금을 구했지만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휴학을 해야 할 판이었다. 가지 말라는 대학을 가면서 내가 선택한 건 간호학과였다. 곧 국가고시를 볼 테고 그럼 바로 일을 할 수 있는데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을 할 순 없었다. 그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마지막 학기를 다녀야만 했다.
병원 실습을 위해 서울에 와야 했지만 지낼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서울에 이모가 둘이나 있지만 그들은 남이나 다름없었다. 고시원비도 부담이 되어 어렵사리 막내 이모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돈을 아낀다는 명목이었지만 그만큼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이모부가 밥상에서 반찬이 이게 뭐냐 할 때면 밥을 한 숟가락씩 덜어내고 먹었다. 하루라도 빨리 내 손으로 돈을 벌고 싶은 날들이었다. 네 살짜리 사촌동생이 시도 때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통에 맘 편히 쉴 수조차 없었다. 그 집에 내가 있을 곳이라곤 없었다. 설거지를 하고 심부름을 하고 사촌동생을 돌봤다. 그게 밥값이라면 밥값이었을 텐데, 아니었을까.
100만 원만 빌려주세요, 했다. 졸업하자마자 취업해서 첫 월급 타면 갚을게요, 했다. 이모부는 어두운 방에서 TV만 쳐다보고 있었고, 이모는 양쪽 눈치를 보는 것 같았지만 별다른 말이 없었다. 돈이 없다 했다. 무릎 꿇고 앉아 울며 사정하는 내게 빌려줄 돈이 없다고 했다. 돈이 없다던 이모부는 얼마 후 차를 샀다.
아빠가 돌아가심과 동시에 친가 쪽과는 인연이 끊어졌다. 그전에도 돈을 뺏어갔으면 갔지 도움 한번 주지 않던 사람들이기에 아쉬울 건 없었다. 그런데 이모들도 매한가지였다. 집도 차도 다 있는 사람들이 누울 방 한 칸 없는 우리에게 돈 100만 원을 빌려줄 수가 없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돈을 마련했고 그렇게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했다. 국가고시를 보고 나는 간호사가 됐다. 공부를 곧잘 했지만 웨이팅이 긴 병원에 지원할 수 없었다. 당장 낼 고시원비도 없었으니까.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병원 한 군데에 지원했다. 지원자 중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졸업과 동시에 일을 시작했다.
돈 100만 원은 나에게 희망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없어도,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도, 엄마가 다른 사람이랑 살림을 차려도 나는 다 버틸 수 있었다. 그때 그 돈을 흔쾌히 내게 빌려줬다면 나는 삶에서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현실에 붙잡혔고 날지 못했다.
그 일 이후로 이모와 연락이 끊어졌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었지만 이모는 나를 찾지 않았고 나도 그러했다. 아마도 내가 엉겨 붙을까 봐 겁났겠지. 내 안에 두고두고 원망이 되어 쌓였던 돈 100만 원. 그 뒤로 나는 돈 100만 원쯤은 언제든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랬던 이모가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한다. 결혼하고 잘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한다. 놀러 와서 자고 가고 싶단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무릎 꿇고 울던 그날 밤에 머물러 있는데 이모에겐 다 지나간 일이 되었나 보다. 차마 오란 말을 못 하겠다. 입이 안 떨어진다.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