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야, 연지야, 선영아, 미숙아, 얼렁 일어나 밥 먹자!”
엄마의 아침 호출은 언제나 집안에 울려 퍼지는 모닝 알람 같았다. 우리는 2남 3녀, 다섯 형제가 함께 살았다. 큰오빠는 어릴 적부터 서울 이모네 집으로 유학을 갔지만, 나머지 남매들은 한 지붕 아래서 시끌벅적하게 지냈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 밥상은 우리 모두의 시작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한 상에 둘러앉으면, 아버지는 이미 식사를 거의 마치신 상태였다.
아버지는 늘 국에 밥을 말아 드셨다. 급한 성격 탓인지 반찬에는 손도 대지 않고 김치국 한 그릇으로 뚝딱 끝내셨다. 우리 가족은 겨울이면 늘 김치국을 먹었다. 그날도 커다란 냄비에 끓여진 묵은 김치국은 투명한 국물에 김치 몇 조각이 둥둥 떠 있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국물 맛은, 참 묘했다. ‘시원하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도 김치국을 떠먹을 때마다 그 맛이 깊이 새겨지는 듯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국물에 밥을 말아 5분도 되지 않아 그릇을 비우고는 가방을 메고 각자 학교로 향했다. 그 한 그릇의 김치국은 추운 겨울날, 점심때까지 배를 든든히 채워주는 에너지였다.
나는 결혼하고 직장 생활하면서 주방과 점점 멀어졌다. 특히 영업직이라는 특성상 저녁은 손님이나 동료들과 회식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가끔 주말에 집에서 반찬을 만들면, “이게 계란후라이야? 부침개야?”라는 남편의 농담 섞인 잔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김치국이라도 끓이면 엄마의 국물 맛은커녕 복잡하고 어색한 맛이 나곤 했다. 같은 김치로 끓였는데, 왜 이렇게 미적거리는 맛이 날까?
요리책을 보고 레시피를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내가 만든 음식은 매번 미묘하게 엇나갔다. 남편은 “손맛이 아니라 똥손맛이야!”라며 놀렸고, 나는 점점 요리할 의욕을 잃었다. 솔직히 남편은 요리를 뚝딱 해도 맛있게 만들어냈다. 맛도 모양도 좋은 남편의 음식 솜씨는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이러니 요리에 손을 놓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아이와 함께 알아서 식사를 해결했다. 나는 대부분 밖에서 끼니를 때우며 스스로를 ‘주방을 떠난 사람’이라 불렀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엄마의 김치국이 떠오른다. 허연 국물에 김치 몇 가닥이 둥둥 떠다니던 그 한 그릇. 그리운 맛이다.
그런데 정작 내 아들은 다르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아들이 “엄마, 엄마 요리가 먹고 싶어요!”라고 말하길 기대까지 한건 아니지만,
“엄마, 나 배민으로 백가네 김치찌개 시켜 먹을게요!” 아들은 내 요리에 대한 추억이 없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오랫만에 한국에온 아들이 맛있는 식사를 해야하는데 내 똥 손맛을 느끼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배달 음식을 시켜 먹겠다고 하니 편하기도 하다.
요즘 혼자 먹는 나의 저녁 식사는 여러 야채나 과일에 통밀빵, 견과류, 요거트, 그리고 와인 한 잔이다. 엄마의 김치국 맛은 점점 기억에서 멀어져 가지만, 그때의 따뜻한 아침 풍경은 여전히 내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다.
언젠가 다시 김치국 냄비에 끓여진 엄마의 손맛에 느끼는 맑은 김치국을 먹고 싶다.
나는 오늘도 점심에 손님을 만나 조미료 듬뿍들어간 양평해장국에 밥을 말아 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