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깊어가는 6월 말, 전남 담양의 한 정원이 조용히 붉게 물든다. 고서면의 ‘명옥헌 원림’에 배롱나무꽃이 만개하면서, 정원의 풍경이 마치 붓으로 그려낸 동양화처럼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일명 ‘목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는 여름 동안 딱 100일간 붉은 꽃을 피워낸다. 그 짧지만 강렬한 개화 시기를 보기 위해 매년 6~8월 사이, 특히 5060 중장년층 여행자들이 조용히 이곳을 찾는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 사색과 정서를 되찾을 수 있는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명옥헌 원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오희도 선생의 아들 오이정이 부친을 기리며 조성한 별서 정원이다.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조선 선비들의 자연관과 삶의 철학이 깃든 곳으로, 지금은 담양을 대표하는 전통 정원으로 자리 잡았다.
‘명옥헌(鳴玉軒)’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정자 뒤로 흐르는 샘물 소리가 옥구슬 부딪히는 듯 맑고 청아하다고 하여 붙여졌으며, 조선 대학자 우암 송시열이 이름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식 정원의 품격, 자연 속 정적인 미학
명옥헌은 차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다. 주차장에서 약 700m를 걸어야 닿는 이 정원은, 마을길과 흙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도달하는 ‘느림의 미학’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한다.
정자 앞에는 사각형 연못 안에 둥근 섬을 띄운 ‘방지원도(方地圓島)’ 양식이 펼쳐진다. 이 구조는 인간과 자연, 우주의 조화를 상징하며, 조선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사유와 이상을 구했던 방식을 고스란히 담아낸 전통 정원의 정수다.
여름이면 이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수령 100년 이상의 배롱나무들이 붉은 꽃을 터뜨린다. 잎 사이로 피어난 꽃들이 바람에 흩날리면, 연못 위로 꽃잎이 퍼지며 수묵화 같은 정취가 완성된다.
정자의 마루에 앉으면 연못과 숲이 한눈에 들어오고, 인공적 구조물을 배제한 자연 중심의 설계는 보는 이의 마음마저 자연으로 이끈다.
5060세대가 찾는 ‘느림의 쉼표’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중장년층에게 명옥헌은 감성적 쉼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잠시 멈춰 서게 만드는 이 정원은, 사색과 치유, 그리고 잊고 있던 감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담양군 관계자는 “명옥헌은 조선 선비의 정신과 자연에 대한 겸손함이 담긴 정원으로, 특히 여름철 배롱나무꽃이 만개한 시기에는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다”며 “현대인들에게도 쉼과 회복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짧은 여름, 단 100일만 볼 수 있는 붉은 물결. 올해 여름, 잠시 시간을 멈추고 고요한 감성을 찾아 명옥헌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