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머무는 곳, 거창의 숨은 얼굴들
올봄, 어딘가 멀지 않은 곳으로 조용히 벚꽃이나 보며 걷고 싶었다.
인파 몰리는 유명 벚꽃길 말고, 조금은 덜 알려졌지만 그래서 더 평화로운 곳.
그러다 ‘거창’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경상남도 깊숙한 곳, 남쪽 산줄기 사이에 포근히 안긴 거창.
봄기운이 한 점 한 점 꽃잎처럼 내려앉는 그곳에서의 하루는 마치 다른 계절을 걷는 듯했다.
수승대, 이름처럼 수려하고 정갈한 풍경
봄의 문턱에서 먼저 떠오른 곳은 단연 수승대다.
백제의 사신이 신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
옛사람들의 배웅 자리가 지금은 가족 캠핑 명소가 되어 있다.
겨울이면 썰매장, 여름엔 야외 수영장으로 계절 따라 탈바꿈하고,
작은 계곡이 잔잔히 흐르는 풍경은 참으로 고즈넉하다.
한가롭게 그늘 아래 누워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도시에서 소모된 하루가 천천히 회복되는 기분이다.
벚꽃 필 무렵, 거창의 진짜 얼굴을 보다
사람들의 발길이 아직 많지 않아 더 아름다운 덕천서원과 용원정은
거창의 벚꽃 명소 중에서도 사진작가들이 조용히 찜해놓은 장소다.
덕천서원은 거창읍 장팔리 벚꽃공원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봄이면 서원 앞 연못과 고풍스러운 건물 위로 하얀 벚꽃이 흩날리며,
마치 그림 속 풍경처럼 보인다. 4월이면 벚꽃 축제도 열리는데,
굳이 붐비는 거리로 가지 않아도 좋을 풍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용원정은 그보다 조금 더 은은한 느낌이다.
병항마을 입구의 돌다리 '쌀다리'를 건너면 나타나는 이 정자는,
100년이 넘은 벚나무와 어우러져 그 자체로 고요한 한 장의 수묵화다.
정자에 올라 팔작지붕과 용무늬가 조각된 천장을 올려다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논도 풍경이 된다, 서덕들
혹시 논밭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었던 곳이 있다.
서덕들이라는 이름부터 이국적인 이곳은, 금원산과 현성산 자락 아래 105헥타르의 청정 논이 펼쳐진다.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드는 이 들녘은
플라스틱 하나 없이, 전봇대도 비닐하우스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다.
메뚜기 뛰는 들판 사이로 걷다 보면,
그저 ‘고요’라는 단어가 마음을 가득 채운다.
참고로, 이곳은 영화 ‘귀향’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담은 장면이 이 황금들판에서 시작되었다니,
자연과 기억, 그리고 치유가 겹쳐지는 특별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은행나무 아래 걷는 황금빛 시간, 의동마을
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사람들은 또다시 거창을 찾는다.
노란 은행잎이 만든 황금 터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동마을 입구의 약 100미터 남짓한 은행나무길.
길지 않지만, 충분히 강렬하다.
‘2011년 거창관광 전국사진공모전’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이 길은
지금은 사진 애호가들이 손꼽는 가을 촬영 명소다.
단풍 든 나뭇잎들이 바닥에 수북이 쌓인 길을 걷는 그 기분,
가을이라는 계절을 진하게 마시는 듯한 순간이다.
밤하늘과 마주하다 – 거창 별바람언덕
하늘을 올려다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감악산 중턱의 별바람언덕은 밤에 진가를 발휘한다.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이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에서
낮에는 국화꽃, 밤에는 은하수 같은 별빛을 만날 수 있다.
항노화 웰니스 체험장이 있어 몸과 마음 모두 힐링할 수 있는 곳.
가을에는 ‘꽃&별 여행 축제’도 열려 낮과 밤의 매력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계절을 담은 정원 – 거창 창포원
계절마다 다른 꽃과 식물이 피어나는 거창 창포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테마파크다.
봄엔 꽃창포와 왕벚꽃, 여름엔 연꽃과 수국,
가을엔 국화와 단풍, 겨울엔 억새와 갈대가 장관을 이룬다.
실내에는 190종 4,500본의 아열대 식물이 자라는 열대식물원과
4D영상관, 키즈카페, 북카페도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도 인기다.
자연과 에너지, 생태학습까지 가능한 이곳은
아이들과 함께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거창, 한 계절이 머무는 풍경
이름처럼 ‘거창한’ 여행지가 아니라
소박하지만 깊은 맛을 가진 거창.
유명 관광지의 번잡함보다는,
자연이 말을 걸어오고 시간이 느릿해지는 여유로움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곳의 벚꽃, 들녘, 별빛 아래를 걸어보기를 바란다.
혹시 이 봄, 조용히 걸으며 사색할 수 있는 여행지를 찾고 있다면
거창은 어떤가?
혹시 이미 다녀온 적이 있다면,
당신만 알고 있는 거창의 숨은 풍경도 댓글로 들려주면 좋겠다.
다음엔 그 길을 함께 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