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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갈 수 없는 그곳, 블라디보스톡에 남겨둔 겨울

비행기 연착부터 킹크랩 파티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작지만 강렬한 3일

by 다닥다닥

공항에서 6시간째, 정신은 이미 이륙한 상태였다.


크리스마스이브, 사람들 대부분은 따뜻한 불빛 아래에서 연인을 기다리거나 가족과 포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겠지.


그런데 나는, 인천공항 의자에 등을 붙인 채 ‘언제 뜨냐’는 말만 되뇌고 있었다.


이쯤 되면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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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는 모든 비행기의 출발을 막아버렸고,

나는 여행자 보험사와 몇 차례 통화 끝에 "4시간 이상 지연되면 식비는 청구 가능하다"는 위안 하나를 얻었다.


그렇게 공항에서 편의점 도시락으로 배를 달래며 ‘이건 다 이야깃거리가 될 거야…’라고 되뇌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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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새벽을 향해 떠오르던 순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눈가엔 맥주, 마음엔 ‘꽃보다 청춘-아이슬란드 편’ 백 번째 재시청.


그 비행기 안에서 느꼈다. 이제 정말,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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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의 첫인상: 따뜻한 차가움

공항에 내리자마자 느낀 공기는 한국보다 훨씬 차가웠지만

묘하게 마음은 따뜻했다.


단출한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은 마치 낯선 동네의 구멍가게처럼

묘하게 정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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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로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숙소는 고급스럽진 않았지만,

침대 셋이 딱 나란히 놓인 방은 친구 셋의 마음을 정확히 읽은 듯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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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금지, 하지만 '고소한 참기름'은 있다?

하이에나처럼 굶주린 배를 안고 간 마트에서

10시 이후 술 판매 금지라는 '러시아의 벽'에 부딪혔다.


"한국이 살기 좋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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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도, 한국 음식이 가득한 마트를 마주하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고소한 참기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해외 마트에서 갑자기 마주한 한글 라벨은, 고향의 냄새보다도 진하게 다가왔다.


러시아가 멀지 않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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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바다 위를 걷다

다음 날, 블라디보스토크의 진짜 얼굴을 보려 도보 여행을 나섰다.


바다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그 위를 걸으며 ‘이걸 보러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차가운 풍경 속에서 왠지 모를 평화가 느껴졌고,

센티멘털한 척을 해보는 나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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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위기는 따로 있었다.


길을 걷다 만난 러시아 보안관이 여권을 보여달라며 막아서더니

영어도, 손짓도, 통하지 않았다.


그때 기적처럼 지나가던 한국 대사관 직원이 우리를 구해주셨다.


타국의 길 한복판에서 마주한 한국어,

그게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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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의 공식 = 블라디보스토크 = 킹크랩

‘블라디보스토크 = 킹크랩’ 이 공식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현지에서 유명한 오그뇩 레스토랑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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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직원 언니가 직접 킹크랩을 보여주며 주문을 도와줬다.


1kg에 1950 루블.

당시 한화 약 3만 5천 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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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라면 눈치 보며 먹었을 크랩을,

여기선 ‘먹고 죽자’ 마인드로 2kg 주문하고

관자요리, 토마호크 스테이크, 와인까지 풀세트로 주문했다.


셋이서 한 끼에 쓴 돈이 1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미쳤다, 블라디보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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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마트에서 못 사도, 펍은 열려 있다

러시아가 아무리 차가운 나라라지만,

그들의 밤은 결코 냉정하지 않았다.


술집에 들어서자 따뜻한 조명,

라이브 음악, 칵테일 잔을 들고 웃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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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복판에 앉아 샘송 TV를 보며 국뽕까지 충전한 우리는,

그날 밤 그렇게 러시아와 조금 더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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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많이 없지만, 느낌은 있다

사실 블라디보스토크는 볼거리로 꽉 찬 도시는 아니다.

하지만 그 여백 덕분인지, 여행 내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아르바트 거리, 영원의 불꽃, 혁명 광장을 걷는 동안

눈은 춥고 손은 시렸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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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사람들이 사랑하는 해적커피도 마셔봤지만

왜 유명한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행이란 그런 거다.

맛의 이유가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이 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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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뭐다? 결국 남는 거다

3일은 순식간이었다.


귀국길, 가방 안엔 러시아 보드카 여러 병이 들어 있었다.

세금 붙여 사 왔지만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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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호텔에서 잃어버린 슬리퍼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덕에 호텔 슬리퍼로 새 삶을 얻었다.


그래, 자수해서 광명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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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건 많지 않아도 ‘느낄 것’은 충분하다.

비행기 연착부터 시작된 이 여정이

오히려 가장 진한 기억으로 남은 걸 보면,

여행의 시작이 꼭 완벽할 필요는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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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낯선 나라의 작은 여정이

누군가에겐 다음 발걸음을 위한 용기가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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