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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룡 Jun 18. 2021

한나아렌트와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은 회의에서 시작된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권력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곳'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통치자의 말이 신뢰를 잃으면 권력은 무너지고, 따라서 힘(무력)을 동원해 누를 수 밖에 없는데, 권력이 폭력으로 대체된 전제정치는 본질적 의미에서 '정부라 할 수 없다'는 말까지 한다.  이는 공자가 말한 무신불립 사상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어느날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데, 공자는 군사와 밥(경제)과 백성의 신뢰라고 답한다. 셋중 하나를 제외한다면, 먼저 군사를, 그 다음엔 밥을 뺄 수는 있는데, 마지막까지 제외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뢰'라고 하면서, 대중의 신뢰가 없다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 말한다. (民無信不立)


그런데 정치만 그럴까. 법률도, 의료시스템도 언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언론은 제4부'라는 말이 있듯이 번외 권력기관으로 인식되거나 대접 받는 일이 많아서, 그 자체로 권력기관인 것 처럼 행사하거나, 실제 힘을 휘두르는 일까지 종종 있다.

대중의 언론에 대한 신뢰를 '공신력'이라고 하는데, 권력의 본질이 그렇듯 바로 이 '공신력'이 언론의 생명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공신력.. 즉 '대중의 믿음'을 얻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오랜 시간동안 먼지처럼 아주 미량으로 조금씩 조금씩 쌓아 올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한순간 발을 잘못 디디면 한번에 훅하고 날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공신력이다.

흔히들 언론사의 규모나 기사숫자, 자본력이 공신력의 본질이라고 생각들을 하는데, 이는 '폭력'(힘)을 바탕으로 하는 전제정이 정치의 본질이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언론의 공신력은 말할필요도 없이 진실보도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쉽나. 복잡하고 다원화된 세상에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에 접근했다손 치더라도 사람들은 예전과 달리 저마다 다른 진실의 창을 끼고 살아가기에, 각자의 이해관계와 진영논리에 맞춰 믿고싶은대로 보고, 보고싶은대로 믿을 뿐이다.


그래서 진실이란 오로지 하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n명의 사람에겐 n개의 진실이 있다'고 대놓고 말하는 자타공인 식자들이 나오는가 하면, 물리학의 불가지론이 사회나 정치학에서도 통하는 것인양 '모든 건 견해차일 뿐'이란 말이 절대권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약한자 편에 서는 것이 진실의 편에 서는 것'이라는 당파적 언론관의 확대해석판인 '우리편에 서는 것이 진실편에 서는 것'이라는 말이 정설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정의가 승리하는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힘 논리의 베타버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정의로운 진영논리보다, 가장 비겁한 기계적 중립이 오히려 낫다'고 나는 믿는다. 중립을 지킬 힘이 없으면 진실을 지킬 힘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사실 언론이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물어보고 또 물어보는 것.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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