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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May 30. 2022

길 위에 서다

속리산 둘레길 7코스 (쌍곡 3거리 - 연풍, 14.6km)

길 위에 서다 - 정연복   


세상의 모든 길은

어디론가 통하는 모양이다

사랑은 미움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생명은 죽음으로

그 죽음은 다시 한 줌의 흙이 되어

새 생명의 분신으로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가만히 머무르지 말라고

길 위에 멈추어 서는 생은

이미 생이 아니라고

작은 몸뚱이로

혼신의 날갯짓을 하여

허공을 가르며 나는

저 가벼운 새들


길은 무엇인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길을 나설까,  

편한 자동차를 두고 왜 두발로 길을 걸을까?

모두 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기는 있다. 길은 단순히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한 경로만은 아니며 우리는 꼭 이동이 필요할 때만 길을 걷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길을 나서고 싶어 한다.  더 나은 머물 곳을 찾아서, 내가 머무는 곳이 안락한 곳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는 그저 길을 걷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라도 길을 나선다. 그 길 위에 수많은 위험과 노고와 불확실성이 기다리고 있음을, 흔히 하는 말로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길을 걷는 행위는 수백만 년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원초적인 행위, 본능 같은 것이리라. 귀찮고 힘들어도 걸을 수밖에 없는 숙명,  걸으면서 단순해지고 걸으면서 생각이 맑아지고 걸으면서 행복해지는 이 마법 같은 현상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속리산 둘레길 7코스의 시작점은 괴산군 칠성면 쌍곡 3거리다. 그런데 현재 안내판이 설치된 장소는 쌍곡 3거리를 살짝 벗어나 있는 데다가 주변에 주차시설이 없다. 따라서 200m쯤 더 가서 미선마을 맞은편에 마련된 공용 주차장을 출발지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  



먼저 이곳에서 태성삼거리까지 517번 지방도를 따라 1km 남짓 아스팔트 길을 걷는다. 그리고 태성삼거리에서 왼쪽으로 300m 걸어가면 장풍교를 건너고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뚝방길을 따라가면 된다. 이제부터 지나는 차도 사람도 없는 호젓한 둘레길의 시작이다. 오른쪽으로는 달천강의 지류인 쌍천을, 왼쪽으로는 신대리 마을과 한창 모내기 준비 중인 논들을 내려다보며 걷는다. 논에는 농부들이 트랙터로 한창 써레질을 하거나 모를 심고 있다. 멀리 앞으로는 조령산과 신선봉, 백화산과 희양산으로 이르는 백두대간의 능선이 아침 안갯속에 마치 동양화처럼 흐르고 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시작했기에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쌍천에는 백로와 가마우지들이 보이고 간혹 물고기가 뛰는 소리도 들리는 것으로 보아서 비교적 생태계가 잘 살아 있는 것 같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쏘가리 참마자 모래무지 등이 서식하고 있단다. 강이 그냥 물이 흐르는 장소가 아니라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는 또 다른 생태계라는 사실이 고맙고 소중하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뚝방길을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어디부턴가에 철망으로 된 펜스가 설치되어있다. 군사분계선도 아니고 강가에 웬 철망울타리인가 싶어서 살펴보니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막기 위한 시설이란다. 그러나 마을을 둘러싸서 보호하는 것도 아니고 군데군데 강을 따라 설치한 펜스가 과연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강 쪽으로 시선을 주기가 부담스럽다.


이번에는 교동교를 건너 맞은편 둑길을 걷는다. 느티나무 몇 그루가 제법 아름드리를 이루고 있고 옆으로는 보에 갇힌 넓은 강과 절벽들이 제법 볼만하다. 잠시 아스팔트 길과 합류했던 둘레길은 갈금리에서 다시 왼쪽 마을길로 접어든다. 마을 입구에는 갈길 마을 안내판과 유래비가 마을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예로부터 칡이 많아서 마치 거문고 줄처럼 늘어졌다 하여 갈금, 갈길이라 불렸단다. 논과 야산 사이의 농로를 따라 10여분 걸으니 이번에는 금대리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금대리는 제법 규모가 크고 마을 입구에 정자나무와 마을의 유래를 담은 안내판이 잘 설치되어있다. 거문고 금자가 들어 있어서 혹시 거문고와 관련한 전설이 들어있을까 하는 기대로 읽어보니 뜻밖에 소궁뎅이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마을 주민에게 들어보니 뒷산 어디쯤에 소궁뎅이를 닮은 바위가 있단다. 바위의 생김새를 설명하다가 젊은 시절 시어머니와 나물 하러 갔던 추억을 주섬주섬 보태신다. 강둑으로는 멋스러운 소나무 숲이 눈을 즐겁게 하고 앞을 흐르는 쌍천과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는 널따란 정자에 앉아 마을자랑을 하시는 어르신들이 행복해 보인다. 잠시 앉아 마을자랑과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다리 쉼을 한다.



 어느새 길은 칠성면을 벗어나 연풍면으로 접어들었다. 갑자기 평범한 마을길 옆으로 그럴듯한 절벽과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하여 다가가 보니 바위에는 오래된 글씨들이 새겨져 있고 조금은 위태로워 보이는 나무계단이 절벽을 따라 놓아져 있다. 조심조심 올라가 보니 일가정이라는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다. 100여 년 전에 경광국이라는 이가 사비로 지은 정자란다. 그리 오래된 정자도 아니고 관리도 잘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연풍 뜰과 백두대간의 능선, 그리고 시원한 바람만은 일품이다.

백두대간의 능선이 눈앞에 펼쳐지고 오래된 소나무들이 절벽과 어우러진 곳, 거기에 옛사람들이 새긴 암각문과 전망 좋은 정자까지......, 뭔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들어서 동행한 조성상 등산지도사에게 물어보았다. 뜻밖에 이곳은 조선시대의 유배지였단다. 유배지라면 주로 섬이나 전라도 해안가 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괴산에도 유배지가 있었다니 신기하다. 자료를 찾아보니 연풍면 유하리 옛 오수초등학교 뒤쪽에 '유도(柳島)'란 지명이 있는데 여기가 조선시대 귀양지였다고 전하고 있다. 정확히 누가 왔는지 전하지는 않지만 연산군 때 이맥과 이준경이라는 분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으리라 짐작된단다. 일가정을 세운 경광국이란 분도 고종 때 유배를 당했고 노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정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유배지, 마치 죄인들을 가둔 형지 같은 느낌이라 자칫 부끄러워하거나 숨기고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배라는 게 사실은 주류에서 밀려난 소수집단, 혹은 위협적인 미래세력에게 내려지는 일종의 정치적인 격리조치이니 부끄러워할 죄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유배지 중에는 서울에서 멀되 풍광은 좋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알짜 여행지가 많다.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가 그러하고 추사 김정희의 서귀포와 다산초당이 있는 강진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유배지들은 역사여행도 겸할 있고 문화적인 소양도 넓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유배지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고 유배지 관광이라는 말도 생겨났단다. 유하리의 경우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유배지임을 알리고 역사적, 문화적 자원들을 발굴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유하리를 벗어나 7코스의 종점인 행촌리까지는 쌍천을 따라 곧은 길이 다소 지루하게 계속된다. 시원한 매실나무 가로수와 뜬금없이 놓인 운동기구들, 그리고 굉음을 내며 차들이 내달리는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높다란 교각 등이  희미한 이미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연풍 읍내로 들어섰다. 마치 계획도시인 것처럼 쭉 뻗은 중앙로와 양 옆으로 오래된 노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약간 묘한 느낌이 든다. 오래되고 쇠락해져 가는 시골 읍내 풍경임이 분명한데 이유를 알 수 없는 활기와 자부심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유는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발길을 옮겼다.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열녀각이다. 내용을 읽어보니 병자호란 때 이곳에 살던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다.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돌아오지 않자 여인은 직접 강화도까지 가서 남편의 시신을 찾아서 업고 돌아와 장례까지 지내고는 자결을 했단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없이 희생된 한 여인의 이야기가 마치 무채색 배경에 한송이 빨간 장미꽃처럼 애처롭다. 굳이 자결까지 해야만 했을까, 시대의 이념에 자신도 모르게 희생된 것은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만은 어쩔 수 없으나 그 시대의 상황으로 충분히 이해는 간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작고 단아한 누각의 모습이 마치 여인의 자태를 보는 듯하다.



 곧은 중앙로를 따라 잠시 걸으니 연풍향교가 나타난다. 향교가 있다는 말은 이곳이 제법 큰 고을이었다는 말이다.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역의 국립 교육기관 겸 유교 성인들의 위패를 모시는 기능을 했는데 최소한 현, 요즘으로 치면 군청 소재지 이상에만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자료를 살펴보니 충청북도에는 청주와 충주를 비롯하여 18개의 향교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연풍향교였단다. 이화령 아래 작고 오래된 동네 연풍이 사실은 한양에서 충주를 거쳐 경상도와 부산까지 잇는 주요 내륙도로, 요즘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의 중간 거점도시였다는 말이다. 연풍향교는 원래 1628년에 지어졌지만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에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1978년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다시 지었단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조용한 건물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방 문의 나무판재가 마치 일부러 연마한 것처럼 나이테가 선명하다. 나이테는 분명 나무의 나이를 보여주는 것인데, 때로는 나무로 만든 문의 나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부속건물에 달린 나무 대문이 정겨워 슬쩍 밀어 본다.


삐이이이 꺼어억


오랜 세월 말을 참아온 듯, 큼직한 소리를 토해낸다. 그 소리가 마치 내 기억 속 깊은 우물물을 퍼 올릴 것처럼 길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잠시 눈을 감아 본다. 보부상과 짐꾼들과 파발꾼들이 북적거리는 주막거리와 학동들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어우러졌을 그 옛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과거는 나와는 상관없는, 어쩌면 실존했는지도 확실치 않은 흐릿한 안개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지 과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순간도 언젠가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과거가 되고 나 또한 후세 사람들에게는 흐릿한 안개가 될 것이다. 모든 과거는 현재였고 모든 현재는 미래의 과거이다. 과거와 현재는 같은 공간을 흘러가는 강물의 앞과 뒤이니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은, 똑같은 무게를 지닌 실존적인 존재이리라.




향교가 있으면 관아가 있을 터, 검색을 해보니 뜻밖에 연풍초등학교 안에 있단다. 울타리 안에 관아와 수령 300년 이상의 보호수를 두 그루나 품고 있는 초등학교, 뭔가 사연이 있을법하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연풍은 정조 때 그 유명한 단원 김홍도가 현감으로 부임한 적이 있으며 관아 건물은 풍락헌으로 1920년대에  학교 건물로 이용된 적이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이면 일제 강점기의 앞부분이니 우리 역사를 가볍게 보려고 일부러 그리했으리라. 하기야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동물원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니 이 정도야 약과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굴곡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역설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연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현장,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장소가 있으니 그게 바로 천주교 연풍성지다. 연풍성지는 교인 추순옥(秋順玉), 이윤일(李尹一), 김병숙, 金말당, 金마루 등이 순조(純祖) 1년(180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처형당한 자리이며 루까 황석두 성인이 안장된 곳이기도 하다. 1790년 경,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통해 숨어든 곳이 산이 험한 연풍이었단다. 이곳에서 문경을 오가며 몰래 선교활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 곳이 바로 지금의 연풍성지 자리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 공소로 사용하기 위해 옛 향청 건물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 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입 후 논과 집 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3개나 발견되어 이곳이 천주교 성지가 되었단다. 불과 200여 년의 역사가 자칫 어둠 속에 영원히 묻힐뻔했다는 말이다. 어둠 속에서 역사를 끄집어낸 형구가 군데군데 설치되어있다. 커다란 돌에 작은 구멍을 내고 이 구멍에 끈을 동그랗게 내놓고 교수형을 시켰단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돌 형구에 마치 핏빛을 연상시키는 붉은 무늬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끔찍한 학살과 야만들은 대부분 종교와 이념을 내세운 국가권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중세 유럽이 종교를 명분으로  끔찍한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십자군 전쟁이 그렇고 수많은 원주민들을 학살한 아메리카 대륙의 개척 역시 이교도를 개종한다는 종교적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나치 독일은 열등한 유대인을 제거한다는 기가 막힌 이념으로 학살을 저질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70여 년 전 제주도와 여수 순천에서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민초들이 죽임을 당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또 수많은 사람들이 보도연맹으로 몰려 학살을 당했다. 더 가까이로는 불과 40여 년 전, 광주 민주화 항쟁 때 또 많은 시민들이 군부정권에 의해 학살을 당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국가는, 종교는 왜 존재하는 걸까? 인간사회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국가라면, 인간에게 물질과 현세를 넘어선 궁극의 진리를 전하고 실천하는 것이 종교라면, 과연 그들에게 사람들을 마음대로 죽일 권리는 누가 주었다는 말인가? 더 중요한 물음이 있다. 종교나 이념을 명분으로 자행된 국가의 야만적인 학살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역사 속의 유물인가, 아니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가? 기가 막힌 연풍성지의 형구 앞에서 무거워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쌍곡 삼거리에서 연풍까지 14.6km의 둘레길을 걷고 연풍 읍내까지 돌아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중간에 유하리에서 간식을 했으니 그나마 이 시간까지 버티었으리라, 자꾸만 식당 간판으로 눈길이 간다. 우연히 만난 미용실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시골 식당이 괜찮단다. 이미 자전거를 타는 라이더들 사이에서는 맛집으로 인증된 곳이라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산채비빔밥과 올갱이국을 시켰다. 평범해 보이는 비주얼과는 다르게 간이 세지 않고 아주 맛깔스럽다. 달고 짜고 매운 도시 음식들에 익숙해진 입맛에는 자칫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는, 그야말로 시골밥상이다. 그리 바쁘지 않은 시간이라 사장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음식에는 조미료를 일절 넣지 않고 단맛도 설탕 대신 매실청을 쓴단다. 손님들은 현지 사람이 주로 많고 인근 연풍성지를 찾는 순례자들, 그리고 자전거를 타는 라이더들인데 그 라이더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풍 맛집으로 소문을 내서 멀리서 온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온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한 사장님이 조그마한 보상이라도 받으시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다. 한번 시작된 이야기는 사장님의 인생사로 슬그머니 넘어갔다. 추가로 시킨 막걸리가 시원하고 달달하다.





 조금 늦은 점심식사에 달달한 반주 한잔이면 아주 만족스럽게 끝낼만도 하련만, 등산지도사 분이 한 곳을 더 권하신다. 우리가 걸어온 둘레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오래된 고찰, 각연사가 있단다.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일단 들어가는 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태성 삼거리 부근에서 연풍로를 벗어나 각연사로 향하는데 그리 넓지 않은 포장도로가 숲속으로 한참이나 이어진다. 숲이 울창하니 무엇보다도 시원해서 좋다.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된 고찰로 대웅전과 비로전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고 보물 제1295호인 통일대사 탑비와 보물 제1370호인 통일대사부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인 석조귀부(石造龜趺)와 팔각옥개석(八角屋蓋石) 등 수많은 보물들을 지니고 있다. 비로전 앞에는 수령 350년의 보리자나무가 아직도 건강하게 버티고 있고 역시 보물로 지정된 석조비로자나불이 볼만하다. 법고와 범종, 운판, 목어도 규모와 느낌이 범상치 않다. 천천히 경내를 둘러보다 보니 감로수라는 약수터가 보인다. 어쩌다 보니 차도 좀 마시고 약수도 떠다 먹게 되어 나름대로 물맛을 보는 편이다. 감로수라는 표현이야 절마다 다 쓰는 것이니 크게 기대하지 않고 조금씩 마셔보았다. 달다. 진짜로 달고 시원한 물이 마시자마자 바로 몸에 스며드는 느낌이다. 비로전 앞에 앉아 추녀에 걸린 하늘을 바라본다. 흰 구름 하나가 산을 넘어가고 있다. 눈을 감고 나뭇잎을 흔드는 조용한 바람결을 느껴본다. 가끔씩 울리는 풍경소리가 귀에 달콤하다. 행복한 순간이다. 이 짧은 행복의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진다. 각연사는 천년고찰이라는데, 과연 천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만큼 긴 것일까? 내가 눈을 감고 바람소리를 마음에 담는 이 순간, 찰나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일까? 찰나와 영겁은 어쩌면 같은 것을 다르게 부르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7코스를 마무리한다. 철이른 오월 더위에 아스팔트길과 마을길들이 지루하기도 하련만 시원한 감로수와 한 줄기 바람으로 잊은지 오래다. 다음에 걸을 8코스를 떠올려본다. 8코스는 보은에서 시작되어 괴산을 거쳐온 속리산 둘레길이 충북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 코스이며, 조령산과 백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둘레길이다. 백두대간을 지나는 둘레길이면 마을길과 강변길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을 터, 다음 트레킹에 대한 기대와 7코스의 추억들을 주섬주섬 추스르며 산사를 나선다. 오후 햇살이 따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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