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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May 27. 2022

양반이 되어볼까, 신선을 만나볼까

속리산 둘레길 6코스 (선유대 - 쌍곡계곡, 15.6km)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재미있지는 않다. 특별히 재미있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니 이름하여 하이라이트다. 속리산 둘레길 모든 코스가 숲과 마을과 강을 이으며 아기자기한 사연들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길이련만 굳이 그중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바로 오늘 걸을 길, 선유대와 산막이길을 통과하는 6코스 일것이다. 5코스의 마지막 도착점에서부터 나를 유혹했던 선유대의 절경이 오늘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선유대로 가기 위해 아스팔트 길을 벗어나 강변길로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것이 목교이다. 조그만 개울을 건너는 나무다리인데 방부목으로 난간을 만든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되지 않은 녀석이다. 그런데 이 평범한 나무다리가 멀리 보이는 사모바위와 고요한 호수, 인적 드문 숲과 어우러져 왠지 신비한 느낌이 든다. 마치 인간계에서 신선계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 같은 느낌이랄까. 다리를 건너니 제법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좁은 오솔길이 동화처럼 이어져있다. 하얀 꽃들을 매단 아까시나무와 버드나무들 사이로 괴산호의 깊푸른 물이 언뜻언뜻 보이고 좁은 길을 따라 애기똥풀들이 노란 꽃들을 피우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초록색 천위에 노란 색실로 수를 놓은 것 같다. 낡은 방부목에 삐뚤빼뚤 써 놓은 안내판이 정겹다. 읽어보니 여기가 새뱅이 나루란다. 새뱅이는 민물새우를 이르는 충청도 사투리인데 주변이 고요하고 수심이 깊지 않으니 과연 새뱅이가 많이 잡혔을 것 같다. 배를 타려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까지 남겨 놓았는데 분위기로 보아서는 노젓는 나룻배라도 나타날것 같다.


이제부터는 넓고 푸른 괴산호를 바로 발 옆에 두고 오솔길을 걷는다. 수면은 잔잔한데 찰박거리는 조그마한 물결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확 트인 괴산호를 건너온 촉촉한 바람이 조심스럽게 뺨을 어루만진다. 행복하다. 둘레길을 걸으며 어느 곳 하나 나쁜 곳은 없지만 이렇게 물가로 난 숲길을 걷는 순간의 취한듯한 행복감은 다른 길에서 맛볼 수 없는 최고의 맛이다. 발은 보드라운 흙과 풀과 나뭇잎을 밟으며 행복해하고 눈은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물을 보며 행복해한다. 물을 건너온 적당한 습도의 바람은 부드럽게 피부를 만져주고 쪽동백 꽃의 은은한 향기, 가끔씩 울어주는 새들의 노랫소리까지......, 그야말로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순간들이다. 이 짧은 순간의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지루하고 힘든 나머지 여정을 참고 걷는지도 모른다.  만일 둘레길중에 경치 좋은 장소만을 골라 자동차로 온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꽃길만 걷는다면 과연 행복할 것인가? 그럴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짧은 행복의 순간을 기억하고 또 기대하면서 묵묵히 견디어내고, 묵묵히 견디는 순간 속에서 뜻하지 않은 짧은 행복의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힘든 과정 뒤에 오는 행복이라야 값지고 소중하다는 것을, 짧은 순간의 행복이 평생동안 참고 살아갈 수 있는 힘과 희망을 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둘레길을 걷는 것과 우리 인생은 참으로 닮았다는 느낌이다.


새뱅이 나루를 지난 지 10분이 되지 않아 잠시 언덕길을 오르면 선유대에 닿는다. 넓은 화강암 바위들이 마치 시루떡처럼 켜켜이 놓여 있고 소나무들이 반쯤 가린 커튼처럼 괴산호를 적당히 보여준다. 건너편으로는 울창한 버드나무 숲 사이로 오솔길도 보이고 왼쪽으로는 사모바위의 뒤통수가 조금 보인다. 사실 지금 서 있는 이 바위는 각시바위라는 다른 이름이 있고 강 건너에는 신랑바위, 혹은 사모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마주 보고 있는데 이를 통틀어서 선유대라고 한단다. 그러나 실제로 둘레길을 걸으며 오를 수 있는 바위는 각시바위, 오늘 오른 선유대다. 때마침 유람선 한 척이 올라온다. 평일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유람을 즐기고 있다. 손을 흔든다. 나는 바위 위에서, 어떤 이는 배 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흔든다. 서로 누군지도 모르고 얼굴도 잘 보이지 않건만, 이 아름다운 괴산호와 선유대를 바라보며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느끼는 진한 행복감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오래된 친구와 다름없다.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서였을까, 배낭을 벗어 핸드드립 한 커피를 꺼낸다. 쌉쌀하고 고소하고 약간은 새큼한 커피 향이 나를 감싼다. 신선이 놀던 바위에서 신선이 바라보던 호수를 바라보며 신선도 마시지 못한 커피를 마신다. 신선이 부럽지 않다.


아쉬움을 달래고 선유대와 이별한다. 숲을 헤치고 오솔길을 걷기 20여분, 옥녀 샘을 만났다. 아니, 이런 오솔길 옆에 웬 샘인가 싶어서 안내판을 읽어보니 옛날 화전민들이 사용하던 두레박 샘으로 양반길을 오가던 나그네와 나무꾼이 목을 축이던 곳이란다. 물이 마르지 않았을까 궁금하여 뚜껑을 열어보니 어둠 속에서 맑은 샘물이 반짝 빛난다. 지금이라도 바가지만 있으면 떠서 마실만하다. 그런데 안내문 중에 마음에 걸리는 구절이 있다. '옥녀 샘은 양반길을 오가던 나그네와 나무꾼이 목을 축이던 곳'이라는 표현이다. 양반길과 나무꾼이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것이다. 물론 양반길은 유명한 산막이 길을 시작으로 화양·선유·쌍곡구곡을 연결하는  명품 둘레길이다. 문제는 길이 아니라 길의 이름이 하필 양반길이냐는 거다. 나무꾼과 나그네가 걸었으면 '나무꾼 길'이거나 '나그네 길', 아니면 다소 과격하게 '상민 길'이라고 왜 붙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지나다니던 나무꾼과 나그네를 슬그머니 지워버리고  어쩌다 유람 삼아 지나다녔을 양반을 길의 주인공으로 턱 하니 올려놓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양반이란 말인가?  


옥녀 샘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옥녀 계곡이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옥녀봉과 아가봉 사이의 청정계곡으로 여름에 더 발을 담그기 어려울 정도로 시원하다고 쓰여 있다. 각시바위에 옥녀 샘에 옥녀 계곡까지......, 이 동네에 웬 여자들이 이리 많은가 궁금하여 동행한 등산 지도사에게 물어보았다. 예로부터 이 지역은 풍수지리적으로  음기가 성한 곳이란다. 그래서 여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고 남자들은 상대적으로 기를 펴지 못했단다.  조금 전 지나온 선유대만 해도 각시바위가 신랑바위(사모바위) 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지나온 사기막리와 운교리를 비롯하여 옥녀봉 아래 마을들은 남성우월주의 시대, 여성들의 해방구였단 말인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풍수지리니 음기니 하는 이유들로 여인들에게 더 혹독한 차별이 가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숲길의 마지막쯤에 다다르자 데크로 만든 전망대가 나타나고 조금 더 걸으면 양반길 출렁다리를 건너서 갈론계곡과 괴산댐이 갈리는 삼거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갈은리와 갈은구곡,  옥녀봉에 이르게 되고 왼쪽으로 가면 산막이 길과 괴산댐에 이르게 된다. 왼쪽으로 200m만 걸어가면 주차장과 유람선 선착장, 그리고 웅장하고도 멋진  연하협 구름다리를 만날 수 있다. 연하협 구름다리는 괴산호를 건너 산막이길과 양반길을 연결하는 현수교로 길이가 167m, 폭 2.1m란다. 순전히 사람들을 위한 다리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고 넓은 강을 건너 높이 매달린 다리의 위용이 대단하다. 현수교라고는 해도 흔들림이 심하지 않으니 중간에 서서 괴산호를 충분히 즐기는 것도 좋겠다. 눈에 거슬리는 게 하나 있다. 다리를 놓은 전임 군수가 다리를 건설한 소회와 노랫말까지 새겨 놓았는데 내용도 조악하고 군수의 치적을 쓸데없이 강조한 듯싶어서 눈살을 찌푸린다.

이제부터 한시간 반 정도는 그 유명한 산막이 길을 걷는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성공한 명품 둘레길중의 하나이다.  7.3km, 왕복 3시간 정도로 적당한 길이에 괴산호를 바라보며 벼랑을 따라 아슬아슬한 오솔길을 걷는 맛이 일품이다. 거기에 군데군데 약수터, 호랑이 바위, 연리지 등의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잘 발굴하여 배치해놓았고 길 역시 데크와 계단으로 정비해놓아서 걷기에 부담감이 없다. 괴산호를 오가는 유람선도 운행 중이어서 갈 때는 걷고 올 때는 배를 타거나, 끝까지 걷고 나서 선유대까지 물길 관광을 즐기는 방법도 가능하다.

연하협 구름다리를 건너면 참나무 숲 속 절벽을 따라 오솔길이 이어지고 곧바로 소나무 숲을 지난다.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지만 군데군데 철제 다리가 놓여있고 길에는 야자매트가 깔려 있어서 무릎과 발목에 전혀 무리가 없다.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괴산호의 푸른 물이 시원하다. 20여분을 걸으면 토끼 샘이 나타난다.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계속되는 요즘 가뭄에 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저 만든 이야기는 아닌듯하다. 삼신바위, 노수신 적소, 산막이 마을, 꾀꼬리 전망대, 연리지, 앉은뱅이 약수, 호랑이 굴, 출렁다리 등의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들이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산막이 옛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훌륭한 소나무 숲이다. 이 지역이 왕릉도 아니고 특별히 소나무를 보호하는 곳이 아니었으련만 크고 듬직한 조선 소나무들이 길을 걷는 내내 따라다닌다. 푸른 괴산호와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하늘과 언뜻 보이고 사라지는 유람선들이 모두 품위 있는 풍경이 되는 것은 소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걷는 둘레꾼도 마주 오는 관광객도 소나무 언덕에 적당히 가리어지고 나타나니 그 또한 재미있고 반갑다.



산막이 길 중간에는 등잔봉- 천장봉으로 이러지는 등산로의 입구가 보인다. 올망졸망 능선들이 괴산호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동행한 등산 지도사에게 물어보았다.  왕복 서너 시간 정도로 부담이 없고 산막이 옛길과 어우러져 한국 100대 명산에도 포함된 괴산의 자랑이란다. 등잔봉과 천장봉 사이에는 한반도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산막이길 맞은편을 바라보면 한반도 지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한반도지형이 아니더라도 산을 오르면서 물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호사다. 그 물이 호수이건 강이건 혹은 바다이건 관계없이 말이다. 문득 사량도와 성인봉, 그리고 얼마 전에 다녀온 향일암을 떠올리며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한번 이곳 내륙에서 섬 산행을 맛보리라 다짐해본다.


지역주민들이 운영하는 상가와 널따란 주차장을 지나 산막이 길을 벗어난다. 산막이 길은 워낙에 좋은 조건에 잘 개발되어있고 많이 알려진 곳이라서 호불호가 갈리는 곳이다. 편안하고 아기자기한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원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최고의 선택이지만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둘레길을 호젓하게 즐기려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코스라는 말이다. 잠시 아스팔트 길과 수전교를 지나 강 건너편 도로로 접어들고 다시 원효사 입구라고 표시된 왼쪽 좁은 포장길을 따라간다. 멀리 비학산과 군자산 능선들이 눈길을 끌고 개울가로는 아카시아 꽃들이 마지막 꽃잎들을 매달고 있다. 계절로 보면 이미 졌으련만 아직도 꽃이 볼만한 걸 보면 이곳이 다른 곳보다 좀 춥다는 뜻이다. 언덕을 오르니 조금씩 황금색을 띄어가는 보리밭이 나를 반긴다. 괴산호를 벗어나서 포장길을 걷느라 잠시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율원리 마을에 이르렀다. 모내기 준비에 바쁜 오래된 농촌마을, 그런데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 너머로 다소 어울리지 않는 자주색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자연드림에 속한 부속건물이란다. 몇 년 전부터 괴산지역에 자연드림 생협이 자리를 잡았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단다. 농민들은 이 생협과 계약하여 유기농 농산물을 납품하고 일부는 직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단다. 오래전부터 괴산은 유기농의 메카로 자리 잡으려 노력들을 해 왔다. 남들보다 앞서서 유기농을 받아들였고 2022년, 올해 9월 30일부터는 세계 유기농 엑스포도 열릴 예정이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흙살림 등 유기농 연구단체들의 노력과 농민들의 앞선 희생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아름다운 명산들과 명품 둘레길 그리고 친환경 유기농 산업단지까지, 괴산 사람들의 선택과 노력들이 돋보인다.


산막이 길을 벗어난 지 한 시간이 채 안돼서 율원 저수지에 도착했다.  낛싯대를 드리운 강태공 말고는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율원저수지에는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다. 군데군데 수초가 자라는 걸로 보아 물고기도 꽤 있겠구나 싶다. 알고 보니 이곳은 관광공사가 추천하는 낛시터로 토종붕어가 잘 잡히고 특히 얼음낛시가 잘 되는 곳으로 입소문이 나 있단다. 보기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고요한 호수 같은데 뜻밖의 반전인 셈이다. 호수를 뒤로하고 한적한 아스팔트 길로 올라섰다. 길 옆으로는 찔레꽃이 흐드러진다. 평소에는 따가운 가시와 덤불로 이쁜 곳 하나 없는 천덕꾸러기가 일 년에 딱 한번, 요맘때쯤이면 새롭게 변신한다. 가시덤불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사한 꽃과 알싸한 꽃향기에 저절로 마음이 간다. 찔레야, 너 거기 있었구나, 인사를 건넨다. 문득 장사익이 노래한 '찔레꽃'이 떠오른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장사익은 찔레꽃을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럽다고 했다. 그 향기가 목놓아 울 정도로 너무 슬프다고도 했다.

노래꾼은 어쩌면 일 년 내내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천덕꾸러기로 살다가 짧은 초여름의 햇살에 화사하게 피어나는 찔레꽃에서 자신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가슴을 후벼 파는 절절한 창법으로 찔레꽃 같은 자신의 인생을 노래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사람들의 냉대와 멸시는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찔레꽃의 시각으로 본다면 뜯어먹을 짐승도 귀찮게 할 사람도 없는 자신의 삶이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한평생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야생화치고는 화사하고 큰 꽃을 마음껏 피우고 알싸한 향기로 존재감을 맘껏 뽐낼 수 있으니  남 부러울게 무어란 말인가? 동행한 등산 지도사 한 분이 찔레순 하나를 건넨다. 껍질을 홀홀 벗겨 입에 넣으니 달착지근 새큰한 맛이 혀를 감싼다.


이제부터의 길이 조금 수상하다. 민가 옆의 오솔길로 접어들어 작은 고개를 넘는데 안내판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있어 헛갈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둘레길이 집 마당 끝과 밭과 작은 닭장 옆을 지나는데 개인의 사유지라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지나가기 부담스럽다. 작은 고개를 넘으니 아스팔트 길과 울타리가 가로막는다. 작은 철계단과 지하도가 있긴 하지만 처음 오는 사람이 제대로 찾아가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축사를 지나고 논과 마을을 바라보는 쭉 곧은 농로를 지나니 지내리, 다시 밤실을 지나 지루한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율지리  미선나무 자생지에 닿을 수 있었다. 일단 그늘이 그리워서 허겁지겁 자생지를 찾았다.


다행히 자생지는 제법 넓은 저수지와 데크길이 잘 정비되어 있는 데다가 찾는 이들이 별로 없어서 한적하게 쉬기에 그만이다. 잠시 배낭을 열어 간식으로 기운을 차리고는 찬찬히 둘러보았다. 미선나무는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희귀 식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단다. 이른 봄, 잎이 나기 전에 희거나 엷은 분홍색의 꽃을 내는데 마치 작은 개나리와 비슷하고 무엇보다도 그 향기가 일품이다. 꽃이 지고 나면 씨앗이 생기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부채를 닮았다 하여 부채 선(扇)  자를 써서 미선(尾扇)나무라고 한단다. 마치 하트를 연상시키는 연초록의 부채 가운데에 핑크빛 무늬가 요염하다.



이제 6코스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후 햇살과 시멘트 포장길을 걷느라 적잖이 피곤한 몸을 달래며 마지막 작은 언덕길을 오른다. 언덕 정상에서 다리 쉼을 하고 이동통신 중계기를 넘어서니 괴산에서 연풍으로 이르는 517번 지방도가 나타나고 6코스의 마지막을 알리는 표지판이 지친 둘레꾼을 반긴다.


그러나 피곤함을 잠시 참고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으니 특이하게 강돌로 집을 짓고 정원도 꾸민 곳, 초원의 집이다. 수십 년에 걸쳐서 두 부부가 손으로 지었단다. 둥그런 호박돌들을 시멘트와 섞어서 담과 벽과 기둥과 대문까지 만들었는데 무엇보다도 그 노고가 얼마나 고될까 싶다. 그러나 입장료 대신이라고 천 원짜리 음료수를 팔고 있는 주인아주머니는 남편이 좋아하는 일이니 자신도 평생 했노라고, 아주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거기에 희귀 식물을 포함하여 예쁜 꽃나무들을 250여 종이나 심었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으신다. 평생 동안 돈도 되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돌집을, 남편의 뜻이라고 묵묵히 함께 지어온 아주머니의 표정이 오히려 여유롭다.


속리산 둘레길 6코스가 끝났다. 신선이 놀던 선유대와 양반길을 지나 명품 둘레길 산막이길을 거쳐 이곳까지, 15,67km를 5시간 만에 걸었다. 속리산 둘레길의 괴산구간이 모두 6개 코스이니 그중에 2/3를 마친 것이다.

다음 코스에 대한 기대로 아쉬움을 달래며 6코스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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