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허지광 vs 사모님.
지광은 자신이 도움 될지 모르겠지만, 김 사장의 아내가 음향기기 매장을 정리하는 것을 돕겠다고 스스로 먼저 말했다. 사실 매장 정리를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이 매장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김 사장의 아내가 어떻게 결정할지가 관건이었다.
지광으로서는 현재 세무조사를 받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납부해야 할 엄청난 세금이 남아있는 상태였고 자신의 지금 재정 상태로는 정상가격을 주고 매장을 인수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광의 욕심은 세무조사를 맞은 저 징그러운 컴퓨터 판매장을 정리하고 김 사장의 아내가 주인인 상태로 자신이 이 매장의 운영만 맡아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지광에게는 이것이 바로 그 구멍이었다.
매장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어수선했다. 아마도 김 사장이 사고를 당하기 전부터 관리에 소홀했던 탓인 것 같았다. 먼지가 쌓인 기기들과 얽히고설킨 전선들이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뒤덮고 있었는데 지광은 그 부분의 매듭부터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물론 사모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고급 음향기기를 아끼는 마음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온 행동이기도 했다. 지광은 흐트러진 기기들을 보며 김 사장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음을 계속 느꼈는데 예전의 상태를 머릿속에 그리며 하나씩 제자리로 옮겨놓고 부산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장 안의 모습이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찾아갈 때쯤 지광은 나머지를 정리하며 슬쩍 기기들의 정보를 사모에게 언급했다. 자신의 음향기기에 대한 지식을 사모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관심 없이 서 있는 사모를 향해 지광은 턴테이블과 앰프, 스피커 등을 손으로 일일이 가리키며 저건 얼마고, 저건 몇 년도 생산이고, 저건 어떤 장점이 있는지를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사모는 지광의 말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매장의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알 수 없는 한숨만 쉬어댔는데 눈썹을 약간 추켜올리고 입은 꾹 다문 채 코로만 내쉬는 그 한숨은 말하지 않아도 이걸 다 어쩌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알아챈 후 지광은 재빨리 매장 안쪽의 청음실부터 청소하기 시작했다. 청음실의 두꺼운 방음벽을 보고 이런 걸 다 부수면 너무 아까운데….라고 생각하며 새로 공사한다면 얼마나 할까? 라면서 툭 툭 쳤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단순하게 두꺼운 것이 아니었다.
‘ 어? 뭐지? ’
이상하다는 생각에 벽면 여기저기를 두드리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지광의 눈에 번쩍이는 제품 하나가 눈에 띄었다. 2024년 뮌헨 하이엔드 오디오 쇼에서 봤던 그 제품이 떡하니 벽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와, 캐스케이드 DAC. 이거 한 1억 5천? 아니 한 2억 할 텐데.’
지광은 자동차 마니아가 슈퍼카를 감상하듯이 순간 멍해졌다. 이 제품을 실물로 영접하다니….
지광은 갑자기 이 기계의 성능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도대체 어떤 음악이 흘러나올까?
“ 사모님, 정말 죄송하지만, 음악을 딱 한 곡만 듣고 작업을 시작하면 안 될까요? 제가 너무 궁금했던 장비가 있어서요.”
사모는 세상에 더는 궁금한 것이 없다는 표정으로 지광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선곡은 당연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8번 중 3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를 엘리아후 인발이 지휘하는 도쿄 메트로폴리탄 심포니의 연주로 선택했다. 이 곡은 웬만한 DAC에서 스테이지와 다이내믹을 만들어 내기 쉽지 않은 곡이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정보는 얼마 전 김 사장에게서 모두 배운 것이었다.
선율이 흘러나오고 지광은 청음실의 소파에 앉아 감상을 시작했다. 금관악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악기들의 디테일이 그대로 느껴졌고 소리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온몸에 울림을 더해 주고 있었다. 음악을 듣자 지광은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음악이 슬퍼서도 아니고, 음악이 너무 좋아서도 아니었다. 그냥 소리가 주는 이 느낌이 감동으로 이어졌고 더는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었다.
‘ 난 오늘 어떻게든 사모를 설득해야 한다. ’
음악이 멈추고 방금까지 열심히 일했던 장비를 구경하기 위해 뒤편으로 움직였다. 총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나씩 하나씩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었다. 그때였다. 장치의 뒤로 작은 틈이 보였는데 지광은 사모를 부르려다가 매장 앞쪽에서 통화 중인 모습을 확인하고는 혼자서 장치를 밀어낸 후 안쪽을 확인했다.
벽의 안쪽에는 밖에서 보기엔 작지만, 내부에 꽤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는 한눈에도 엄청난 양의 현금 뭉치들이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킨 지광은 부리나케 문을 닫고 장치를 제자리로 돌려서 가려놓았다. 때마침 사모가 전화를 끊고 청음실로 들어왔는데 다행히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았다.
“ 음악은 다 감상하셨나요? 이제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
사모의 말에 지광은 “ 아, 네. 네”라고 허둥지둥 대답하며 정리를 시작했다.
먼저 컴퓨터를 켜서 재고 장을 확인한 다음 매장에 있는 제품들과 하나씩 비교해 나갔다. 앞쪽에 전시된 제품은 주로 1억 이하였고, 안쪽에 전시된 제품들이 초하이엔드 제품들이었다. 1억 원이 넘는 초하이엔드 제품만 해도 수십 가지였는데 나름 오디오 마니아인 지광은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컴퓨터를 켜서 매장의 재고와 장부를 확인하니 죽은 윤 사장과 소리 없이 떠나버린 최 사장의 이름도 등장했다. 사모의 목적은 현재 남에게 줄 돈과 받을 돈. 그리고 남은 재고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는데 지광은 그 대답을 주기 위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문득 뭔가를 결심한 듯 갑자기 의자를 돌려 사모에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 저…. 사모님. 사실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사모는 의아한 눈빛으로 지광을 바라보았고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식의 눈빛을 보내왔다.
“ 지금 이 매장에 있는 제품들을 시가로 환산하면 적어도 수십억은 될 겁니다. 그런데 이 제품들은 사실 주인을 잘 만나야 그 가치를 하는 것들이라서 급매의 형태로 처분하게 된다면 거의 제값을 받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사모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매장의 운영을 제가 맡아서 해 보고 싶습니다. ”
화살은 날아갔다. 이제 사모의 답변이 있을 차례.
하지만 사모는 아무 말 없이 지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고민이 되겠지.’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다.
입을 꾹 다문 채 지광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모는 지광에게 극심한 긴장을 주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지광은 끝까지 대답을 기다렸다.
“ 그럴게요. ”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짧은 대답. 지광은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 운영에 대한 계획은 차차 말씀드리겠지만 대략적으로는 이렇습니다. 현재 매장에 있는 제품에 대한 리스트를 사모님께서 확인하시고 추가 구매와 판매가 있을 때마다 제가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수익금 일부를 제게 수수료의 형태로 주시면 될 것 같아요. ”
사모는 세상사에 관심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고 그럼 오늘부터 모든 것을 맡길 테니 자신은 이만 돌아가겠다고 했다. 지광은 문을 열고 나가는 사모를 향해 얼굴이 신발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수도 없이 인사를 했는데 마치 자신의 꿈을 이룬 것처럼 행복에 젖었다.
그동안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룬 지광이었지만, 마음 한편이 개운하지 않았다는데 그 이유는 아까 청음실에서 발견한 현금 뭉치들 때문이었다. 좀 전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 사실을 숨겨버렸지만, 나중에 발견한 것처럼 해서 사모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스러웠다.
자신을 믿고 맡겨준 사람을 배신하는 느낌도 들고 죽은 김 사장의 영혼이 왠지 자기를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민한 후 지광은 매장의 문을 잠그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순식간에 매장은 적막해졌는데 통유리로 된 매장은 어쩐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광은 블라인드를 내렸음에도 괜히 사람들의 시선이 닿을까 걱정스러웠다.
‘누군가가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지광은 블라인드가 완전히 닫힌 후에도 잠깐 제자리에 서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긴장감을 느꼈다. 그리고 숨을 한번 깊게 내쉰 후 마른침을 삼키며 청음실로 들어가 아까의 벽장 금고를 다시 확인했다.
셀 수 없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고개를 꺾어 아무리 들여다봐도 금액을 다 예상할 수가 없었다.
‘일단 두자.’
세무조사로 인한 자금 압박도 떠올랐고 수많은 욕심이 지광을 유혹했지만, 지금은 일단 두고 매장을 정상화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 어? 그런데 저게 뭐지? ’
현금다발에 파묻혀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노트 같은 게 몇 권이 있었다. 지광은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멈추고 손을 뻗어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펼쳐보니 살짝 먼지 냄새가 났지만 최근까지 사용한 것 같은 흔적이 있었고 그 안에는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그 뒤에는 초하이엔드 제품들의 품명과 금액이 적혀있었다.
이것은 누가 봐도 단순한 장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