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허지광 vs 여진.
진실. 그리고 협상
23장. 허지광 vs 여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눈을 뜨니 지광은 자신의 옆으로 검은 헝겊을 덮어쓴 남자가 한 명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덩치 한 명이 헝겊을 벗기니 그 사람은 얼마 전 급하게 시골로 내려갔다던 최 사장이었다.
“ 장부 어딨어요? ”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왠지 익숙했다.
‘ 어? 이 목소리는….’ 그녀는 바로 김 사장의 애인인 ‘여진’이었다.
“ 당신이 여기 왜?”
지광은 묶인 몸을 비틀며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는데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 안녕? 지광 씨. 골프장에서 보고 오랜만이네? 내가 당신이랑 왠지 인연이 있을 것 같더라고.”
여진은 예쁜 얼굴이 무색하게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 사실 이 거래들 내가 다 주선한 거야. 기업도 하나씩 섭외하고 그 기업들이 법인 돈 빼는 데 문제없도록 세탁도 해 주고…. 뭐 한마디로 정치인들의 로비 브로커지. 워낙 많은 돈을 움직여야 해서 여기저기 꼬붕들을 세팅을 해 두고 있었는데 이번 김 사장은 몇 년 써먹지도 못하고 당신 때문에 다 망해버렸네.”
“ 아무튼 이제 판을 새로 짜야해. 그래서 지금까지 세팅한 건 싹 정리해버리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위험한 건 당신이랑 가짜계산서 거래를 했던 사람들이라서 그 인간들만 정리하면 되겠더라고. 세무조사 맞으면 우리까지 얽혀서 골치 아프니까…. 그래서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던 거지. 이제 당신이랑 최 사장만 남았네. ”
크크크 웃는 여진의 소리에 주변에 있는 덩치들도 슬쩍 웃음에 동참했다.
“내가 그 인간들을 이용하긴 했지만, 법인세 신고를 어떻게 하는지 누구랑 어떤 거래했는지까지는 자세히 다 알지 못했었거든. 그런데 리베이트 프락치 주제에 세금을 줄이려고 이런 짓을 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수수료를 그렇게 받아 처먹었으면서 탈세할 생각까지 하다니…. 참 나.”
여진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그리고는 필터에 빨간 립스틱 자국이 남은 담배를 지광의 입 쪽으로 가져오며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눈짓을 보내왔는데 지광은 담배를 받아 물고 쭉 한 모금 깊게 들이마셨다.
다시는 담배를 피울 기회가 없을 사람처럼….
“처음에는 알아보니 내 꽁다리들이 다들 당신한테 가짜세금계산서를 발급받았더라고. 그래서 당신이 받는 세무조사를 대충 무마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때는 진심으로 국세청에 백을 써 줄 생각이었어. 그런데 허 지광 당신이 선을 넘은 거야.
그래서 당신은 이제 너무 많이 알아버린 벌을 받는 것이지. 이번에 김 의원님이 대선에 출마하는 거 알지? 우리도 어쩔 수 없어. 깨끗하게 정리해야 뒤탈이 없거든. 야당 쪽 인간들이 우리 꼬투리를 잡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어쩌겠어.”
눈썹을 슬쩍 추켜올리며 웃는 모습이 너무 두렵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지만, 지광은 마지막으로 애원했다.
“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그리고 김 사장이 했던 역할은 제가 더 잘할 수 있어요. 제발 부탁합니다.”
지광은 살아남기 위해 죽은 김 사장의 역할을 자신이 하겠다고까지 사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