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별 관련 없어 보이는 독후감.
온갖 것을 수치화하여 평가하는 비정한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평생에 한 번쯤은 결국 넘어서지 못할 벽을 느끼게 된다. 그 벽이 너무나 많다고 느낄 때, 자신의 물질적 한계를 명확히 느껴버려 절망 말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 가련한 인간들은 정식적인 것에 심취하게 된다.
정신은 계량화가 곤란하다. 그렇기에 정신과 철학의 분야에선 등급 매겨지지 않아도 된다. 자유롭게 가지를 뻗어나갈 권리를 얻게 된다. 그 자유가 때론 진리 같은 것에 맞닿는 경우가 있다. 그때 그 인간의 역동적인 사상 개발은 철학이라 이름 붙여지며, 도서관에서 도서관으로 전해지게 된다.
인류 중 극소수는 천재성을 갖고 태어난다. 그들은 인류를 발전시킬 유산을 남긴다. 증기기관이나, 자동차, 전기, 전화, 인터넷 같은 것들. 유례없는 부를 인류에게 선사한 그들의 유산은 꼭 축복만은 아닐지 모른다. 쌓여놓은 부가 분배되는 과정에서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신분에 따라 부를 분배하느냐, 능력에 따라 부를 분배하느냐. 그것도 아니라면 평등하게 부를 분배하느냐. 어떤 분배 방법도 완벽하지 않다. 그나마 합리적이라 여겨지는, 능력에 따른 부의 분배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배태하고 있던 수많은 불합리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수많은 불평등 문제가 도처에 만연해 있다. 특히 성별과 지역에 따른 갈등이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나날이 그 덩치를 불려가고 있다. 혹자는 그 문제들을 너무나 단순하게 여기고, 쉽게 발언하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바깥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제한적인 시야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눈에 세계는 너무나도 단순한 곳이다. 극단적으로 치우진 사상을 가진 자들의 얘기이다. 어쩔 때는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사상 덕분에, 머릿속에 수많은 인간들의 감정을 고려하고, 함께 아파하는 부류가 겪어내야 하는 필연적인 고통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별 문제의 본질은 반론의 여지 없이 부를 어떻게 분배하느냐의 문제이다.
'부자는 능력이 좋아서 많은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반대 계층은 그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재물을 축적하지 못한 것이다. 이기적인, 그래서 철저히 합리적인 경제인이 어째서 능력이 없어 재물을 축적하지 못한, 약자 개체를 도와야 하는가? '
자기 복제를 염원하는 유전자를 그 본질로 하는 생명체는 그 기원과 더불어 적자생존의 논리대로 진화를 거듭해 왔다.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특성을 지닌 개체가 죽지 않고, 계속해서 종 내에 그 유전자를 퍼뜨리는 경우, 그 종은 결국 멸종하고 만다. 왜 인류는, 결국 자연의 일부에 속하고, 역시 세포 내 스물세 쌍의 유전자를 상전으로 모시고 있는 생명체인 인류는.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유전자를 보존하려 하는가. 왜 스스로 종 전체의 약화를 초래하려는가.
인권.
실존하지 않는 그것.
그것은 인간의 수많은 합의 과정을 거치며 태어난 정신적 가치이다. 그렇기에 시대마다 그 개념은 변천한다. 인간에겐 천부적인 권리가 있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 약자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다 온갖 제약을 감내해야 하는 개체에게도 역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들을 약자라는 이유로 모르는 척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스스로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강자와 약자의 정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 역시 어떤 개체들로부터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약자도 절대적인 강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약자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나'역시 강자들에게서 권리를 박탈당할 뿐이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법칙에 종속된 자연 상태로의 회귀가 인류 발전의 결과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에겐 정신이 있고, 의식이 있다.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점은 그것이다. 의식과 자아가 없는 짐승들은 협약과 규약의 개념을 이해하지도 이용하지도 못하지만, 우리는 협약과 규약을 통해 공동선을, (선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차치하더라도, 실제로 협약을 통해 인류는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다소 제한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여러 무역 협약의 눈에 보이는 이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추구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말은 곧 이렇게 번역될 수 있으리라. 인류는 자연 상태를 초월한 어떤 곳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겪고 있다. 그렇기에 인류는 끊임없이 소통하며, 가치를 창조해내야 한다. 그 가치가 자연 상태를 그대로 본딴 적자생존이자 약육강식이라고 한다면, 인류의 이 모든 발전은 그저 공회전에 불과하다는 소리이리라.
하지만 복지를 위해서는 부가 필요하다. 복지만 존재해서는 정작 필요한 원료인 부를 구할 수 없다. 인류의 무궁한 물질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철저한 자본주의 약육강식 논리 덕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욕망이 없는 자는 의지 역시 박약하다. 남들을 밟고 일어서겠다는, 우월감을 향한 욕망이 얽히고설켜 이토록 찬란한 경제 발전을 이루어 왔다. 배 곯던 한민족이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 삼십 분만에 그날 일용할 양식을 얻어낼 수 있게 될 때까지. 무수한 약자의 죽음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죽음과 도태의 두려움에 떨던 이들의 발버둥이 쌓이고 쌓여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게 되었다. 우월감을 향한, 삶을 향한 이기적인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논의는 사상누각이 되어 버린다.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선을 추구할 수는 없을 것인가.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를 부정하지 않고, 인간의 이타성을 발굴해낼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실험의 해결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철학이다. 니체가 신의 빈 자리를 초인으로 채우려 했듯이. 우리는 봉합되지 않으리라 여겨지는 두 요소의 간극에 무언가를 채워 넣기 위해 사유(->철학)해야 한다. 그것이 의식과 정신을 얻어낸, 지성인들의 의무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다양한 생각을 접해야 할 거라는 점이다. 니체의 명성 때문에 그의 저서와 사상에만 얽매이는 것은 또다른 천치의 행동이다. 니체는 지금의 사회를 겪어 보지 못한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잔재이다. 역사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함이지. 서적을 그대로 필사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역사서 역시 한 인간의 저작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책에 적혀 있는 과거의 자취들을 내 것으로 흡수하여, 그것을 통해 나만의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수많은 정신적 시도를 통해 내 사상이 철학이라 인정받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싶었다. 철학 동경의 계기는 아마도 그것이리라. 우월감을 향한 욕망, 그리고 죽음과 도태에 대한 두려움. 도무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모를 나의, 인류의 여정을 정의하고 싶은 형이상학적 욕구.
니체의 가르침은 사실 나와 크게 관련 없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종교가 없었던 내게, 신은 죽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 본연의 가치를 세우라는 가르침은 생득권과 마찬가지였으니. 그래서 나는 다른 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