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크하드 Jan 03. 2024

여성성을 잃지 마

그림 - 여자였던 이십 대.

첫째 망아지를 낳고 내 몸은 늙은 어미 말처럼 많이 노쇠해졌다.

일단 몸이 너무 추워져서 겨울이 다가오는 게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

첫째를 낳은 그 해 여름, 다들 더워 죽겠다는데 난 참을만한 정도였다.

우리 망아지가 태어난 달은 삼복더위 8월이었는데 그때도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었다.

둘째 강아지를 가진 해에 에어컨을 장만했으니 거진 4년 동안 에어컨 없이 아이를 키운 것이다.

2018년은 몇십 년 만에 온 폭염이었던 해였는데 그 폭염을 선풍기로 버티다니 기염을 토할 일이다.

신랑은 회사에 가면 에어컨 바람이 나오니 토요일에도 회사로 도망치기 일쑤.

난 망아지랑 둘이 에어컨 없는 집에서 버텼다. 버틸 만하니깐 버틴 건가?!

지금 생각해 보니 미련하기 짝이 없다. 나는 둘째 치더라도 망아지에게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두 번째, 관절이 많이 약해졌다. 손목이 너덜너덜해졌다는 표현이 딱 일듯 하다.

하루 종일 젖병 씻기고 매일 아기 목욕 시키고 잦은 물걸레질에 내 손목은 그냥 팔에 달려 있을 뿐 힘이 들어가질 않아 가끔 컵을 놓치기도 하고 피클 뚜껑, 스파게티 뚜껑 등을 딸 힘도 없어 억지로 열다 보면 악하고 곡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아지 때는 첫아이라는 의욕이 뿜뿜 할 때라 아기 띠를 하고 혼자서 대중교통으로 문화센터, 키즈카페, 수족관 등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면 잘 때 꼭 어깨가 쑤셨다.

한 번은 생후 두 달이 지난 첫째 아이 얼굴 보여줄 겸 내 생일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때 내가 방구석에서 꺼낸 비장의 운동기구!!

안 쓰는 긴 목양말에 테니스공을 넣고 휘둘러 어깻죽지를 내려치는 수제 재활도구였다.

인터넷 검색으로 돈 한 푼 안 들고 만든 기발한 결과물이라고 나름 뿌듯해했는데 실상은 빨았지만 꼬질꼬질한 양말 거죽대기로 스스로 내 어깨를 내리치는 모습이 결혼 안 한 친구 입장에서는 충격이었나 보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땐 아기가 돌도 안 지난 상태라 친구가 생일선물 뭐 해줄까 물었을 때 나는 당당히 기저귀 가방을 말했다.


본인 생일선물까지 출산선물을 고르고 있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운동기구로 목이 늘어난 수유티를 입고 저러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불쌍하게 보였을까?

평소 신박하고 유쾌한 친구가 공 양말을 휘두르는 나의 손을 잡더니

"여성성을 잃지 마"라며 슬프게 웃다가 갔다.

벌써 십 년 전인데도 그 친구의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5년 후 나는 신랑직장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를 왔고 나중에 그 친구 소식을 절친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 친구도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밤에 잠을 안 자는 에너자이저라 혹독한 육아 신고식에 얼굴은 파리해지고 몸은 무채색 옷으로 치장. 말 그대로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게 됐다고.


내가 나중에 그 친구랑 통화할 일이 생겨서 물어보았다.

너 그때 내게 한 말 기억해?

여성성을 잃지 말라고 한 말~

그랬더니 자기가 그런 말을 했다니 기억도 안 날뿐더러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었다고 고해성사를 하였다. 

누구에게나 찬란한 젊음 시절이 있다. 그 추운 크리스마스날 남자친구랑 데이트한다고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었던 나의 20대 시절. 

지금 내 옷방에는 짧은 치마 한벌도 없고 죄다 우중충한 색깔 옷들 뿐이며 신발장에는 굽 없는 운동화에 단화만 가득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여자였던 20대. 그래도 왼쪽 어깨엔 첫째 아이, 오른쪽 어깨엔 둘째 아이를 안고 잠자리를 들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만큼 금은보화를 끌어안고 자는 기분이 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