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 기억]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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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아주 짧은 순간에 끝난다. 약간의 기억조차 남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그 순간에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숨을 쉬고 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게 끊겨버린 것만 같다고 느낄 때쯤,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어지러웠다. 어느 순간 갑자기 쿵 하며 떨어지는 느낌이 들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머리는 아팠지만, 몸은 개운한 것을 보니 꽤 오랫동안 잔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해가 저물고 있는 늦은 저녁과 밤 그 사이였다. 나는 바닥을 딛고 일어났다. 먼지가 조금 쌓인 나무 바닥은 차가웠다. 맨발이었던 탓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작은 나사에 상처가 났다. 쓰라렸다.
계속해서 기침이 났다. 목이 건조했다. 아무래도 자는 내내 입으로 숨 쉰 듯했다. 왼손은 오른손보다 뻐근했다. 안 좋은 자세로 계속 잤던 탓이었으리라. 몸에선 땀이 흘렀으나 창틈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금방 말랐다. 오히려 몸이 건조해졌다. 차갑고 시린 겨울의 한기가 벌써 찾아온 것만 같았다. 난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너무 깊게 잠들었던 것인지 뇌의 사고가 멈춰있었다. 어둠 속에서 현실로 온 정신을 옮기는 데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해야 했다. 그저 가만히 숨만 쉬는 본능만이 남은 채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볼 생각보다 크게 숨을 들이켤 생각을 먼저 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당장 내가 무얼 해야 할지, 무얼 하다 잠들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생체리듬이 깨졌다는 걱정뿐이었다.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 아래 펼쳐진 도시가 오늘따라 낯설었다.
거실로 나왔다. 이곳은 내 집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집이었다. 이곳에 와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누구의 집인지는 몰랐다. 이 집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도망을 가기엔 머리가 아프니, 누군지 모를 집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을 걸 좀 얻어먹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바짝 마른 목에서 계속 기침이 났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난 무작정 기다리면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 줄 알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집주인은 오지 않았다. 난 따분함에 못 이겨 오래되고 낡은 책장을 뒤졌다. 언제부터 꽂혀있었는지 모르는 남빛 책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년 전에 쓰인 피에르라는 작가의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수필집, <흑백기억>이었다. 얇은 책이었다. 나는 먼지를 턴 소파에 앉아 먼지가 가득한 책을 펼쳤다. 글자는 좀 지워졌지만, 읽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나는 그의 책을 읽어 내려갔다. 딱히 독서를 자주 했던 건 아니고, 그저 심심했을 뿐이었다.
「 친애하는 당신께.
…1888년의 봄도 따스합니다. 이 글을 통해 제 이야기가 당신께 닿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소설을 낼 때마다 매진되는 이 영광을 당신께 돌리고 싶습니다. 인간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마는, 자랑을 조금 보태어 지금 저는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는 글쓰기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제인 3월 9일, 저는 또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그에 따른 벌을 소재로 한 소설, <아름답다는 시선>이 영국 소설시장 최초로 발간된 지 24시간 만에 1만 부를 판매하고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독자가 되어주신 당신 덕분이고, 그것에 너무 감사합니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제 이야기를 쓰는 수필집인지라 발간되어도 큰 판매량을 기록하지는 않으리라고 예상되지만, 저는 그저 이 세상과 독자, 그리고 당신께 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수필집을 낸다는 것에 기쁩니다.
제게 더 이상 글쓰기는 노동이 아닌 삶의 낙이 되었고, 그 기세에 지금 또 신작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 끔찍했던 전염병인 ‘흑사병’을 소재로 한 소설인데, 하루빨리 완성하여 당신께 보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이 신작 또한 사랑받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래왔고, 당신께서 계속해서 꾸준한 응원을 보내주었기에 가능한 확신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중략)
…1852년 8월 14일은 제가 세상에 나온 날입니다. 본래 프랑스 리옹Lyon에서 태어났지만, 두 살 무렵 런던London에 위치한 외딴 주택으로 이민을 와 그 뒤로부터 약 15년을 보냈습니다. 주택 입구에는 두 마리의 사자 석상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고, 마당으로 들어서면 멋진 말 석상이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 거기서 흐르는 물은 정말이지 맑고 투명합니다. 부족한 것 없이 유년 시절을 보내게 해 준 아름다웠던 생가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그래도 나름 평범하게 유년 시절을 보낸 편이었는데, 유명한 소설가가 되게 해 주심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감사드립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렇구나. 책은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책을 읽기는 싫었다.
배가 고팠다. 몇 끼는 굶은 듯했다. 물론 정확히 몇 끼를 굶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집주인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부엌에는 식탁 위에 놓인 사과 몇 개가 전부였다. 사과를 들어 입에 베어 물었다. 음, 사과는 꽤 맛있었다. 입 안 가득 달콤하고 은은한 사과의 향기가 퍼졌다. 과즙이 무지 많았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어느새 사과를 다 먹어버렸다. 배는 여전히 허전했다. 집안을 뒤져 사과를 찾던 중에, 밖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다. 집주인이 왔나 보다.
차분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둔탁한 발소리는 점점 커졌다. 이윽고 내 집 문 앞에 멈춰 선 발소리의 주인공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현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둡고 조용한 상황 속에서 정체를 모를 사람의 노크 소리가 들려와 정적을 깼다.
“다니엘? 안에 있는가?”
나는 조용히 있었다.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집주인이 아닌 집주인의 친구 같았다.
노크는 멈추지 않았다.
“다니엘?”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는 매우 시끄러웠다. 나는 그 시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천천히 다가가 아주 조금 문을 열고 그 틈으로 밖을 확인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제복을 갖춰 입은 중년의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는 경찰이었다.
“누구세요?” 그에게 물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앤드루 경이오.” 그가 답했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군.”
해가 지는 노을이 그에게 역광으로 비춰 그의 각진 얼굴에 근엄함을 더했다. 런던 광역 경찰서 배지가 그의 가슴팍에서 반짝였다. 이곳저곳 붓고 터져 거칠거칠한 그의 입술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간결하고 명확하게 설명해주었다.
“저 말입니까?”
“그렇소.”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내가 물었다.
“자넨 너무 조용하게 산다는 뜻이오.” 그는 두루뭉술하게 둘러대었다. “바로 본론을 꺼내도록 하지. 자네 누나가 한 명 있다지?”
“예?”
“자네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군. 며칠 전 킹스크로스역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피해자가 바로…,”
“저한텐 누나가 없는데요?”
앤드루 경이 말을 하다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래, 지금 자네에겐 누나가 없지.”
“저는 원래 누나를 포함해서 단 한 명의 형제자매도 없습니다.”
앤드루 경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을 정리하려 애쓰는 듯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뭔가를 잘못 먹은 게 분명하군. 아니면 장난치는 것인가? 내가 장난을 못 받아줄 정도로 유쾌한 사람이 아니라 유감이오.”
“지금까지 장난이 아니셨군요.”
“다니엘, 내가 퇴근 시간을 늦춰가며 자네를 찾아온 것에는 이유가 있소. 내 말을 들어보게.” 그가 말했다.
“저는 다니엘이 아닙니다.”
앤드루 경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 얼굴을 자세히 보십시오. 벌써 노안이 오신 겁니까?” 내가 말했다. “다니엘이라는 자의 얼굴을 알고 있기는 한 건가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노안’이라는 단어를 듣고 본인이 정말 노안인 건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사실 알츠하이머를 의심해보라고 하려 했었지만, 조금 순화하여 노안이라는 단어를 꺼낸 것이었다.
“진심으로 다니엘이 아니라고? 그럼 자넨 누구인가?”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
“클로드 베르나르라 합니다. 프랑스인이죠. 중요한 것은 제가 다니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답했다.
“자네, 오늘 이사 온 건가?”
나는 정확한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장난을 받아줄 상황이 아니오, 다니엘. 클로드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네.” 앤드루 경의 엄격함이 드러났다. “어제 내가 이곳에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곳은 다니엘의 집이었소. 자네가 생각해도 하루아침에 집주인이 바뀌어버린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찾아오신 겁니까?”
“다니엘의 누나가 며칠 전에 큰 해를 입었고, 난 그 사실을 전하러 왔을 뿐이오.” 그가 반듯이 눌러쓴 모자를 슬며시 벗으며 말했다. “근데 자네가 다니엘이 아니라니 어쩔 수가 없군! 물론 다니엘도 이를 알고 있긴 할 거요. 자기 누나가 죽었다는 사실을 며칠째 모르고 있을 멍청이는 없으니까 말이오.”
앤드루 경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으나, 난 그 원인에 대하여 정확히 추측해내지 못하였다.
난 살해당했다는 말에 그 어떠한 감정적인 동요는 없었으며, 사람이 죽었다는 자극적인 요소 자체에 더 이끌리는 듯했다. 앤드루 경의 표정도 형식적으로 지어 보이는 껍질일 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큰 해를 입다뇨.”
“흠, 킹스크로스역 뒷길에서 사람 둘이 죽은 살인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인가?” 앤드루 경이 심각한 표정을 드러내며 물었다.
“모릅니다.” 내가 말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기자도 경찰도 아니니까요.”
“참, 오늘 왜 이러는지. 며칠 전에 킹스크로스역 뒷길에서 사람 둘이 죽었소. 살인사건인데, 범인 되는 놈이 사람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자신도 같이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소만…, 정말 몰랐단 말이오? 입소문이 꽤 빠르게 퍼졌을 텐데.”
“제가 왜 그걸 알아야 하죠?” 그에게 되물었다. “또 왜 그런 추정을 하시는 겁니까?”
앤드루 경의 불편한 기색이 점점 더 역력해졌다.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확하진 않으나, 현장에서 발견된 건 총기 한 자루뿐이었고, 두 시신에서 모두 총에 맞은 자국이 발견됐네. 각각 복부와 머리…,”
“아뇨, 제 말은 왜 그런 의미 없는 추정을 하고 계시냐는 겁니다.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밝혀내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앤드루 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남는 것이 있던가요?” 내가 말했다.
앤드루 경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자기 입술을 뜯었다. 피가 흐르자 앤드루 경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물론 무고한 시민이 죽어버린 건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라네.” 그가 말했다. “다니엘이 그녀의 마지막 남은 가족이었소만, 어쩌면 그녀에게 남은 가족은 더 이상 없는 걸지도 모르오.”
“경찰이세요?”
“자네 정말 왜 그러는가?”
“하나만 더 말하자면, 저는 원래 누나가 없습니다.”
“그래 알겠소. 이미 얘기했다네.” 앤드루 경이 복잡한 심경을 한숨으로 내뱉었다. “그러니까 자네는 다니엘도 아니고, 누나도 없다는 거잖소.”
“예.”
“그럼 자넨 지금 무얼 하고 있었던 거지?” 앤드루 경이 수첩을 꺼내 들고 펜을 손에 쥐었다.
“잠을 자다가 방금 깼습니다.”
“무얼 하다 잠든 건가?”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입술을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그러나 끝내 대답할 수 없었다.
“알 것 같소.” 앤드루 경이 자기 수첩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자넨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서 잠든 거야. 술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군.”
“그건 아닐 겁니다. 술은 안 보였어요.”
그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앤드루 경이 날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아닐 겁니다?”
그는 이미 나를 수상쩍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머릿속으로 돌려보며 가장 그럴싸한 정황을 찾아내려 애썼으리라.
“과도하게 술에 취해 잠든다면 기억이 완전히 나가버리고는 하지.” 앤드루 경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머리를 짧게 잘랐군. 우울증이라도 걸린 것인가?”
“술은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답했다. “우울증은 아닐 겁니다. 설령 우울증에 걸렸다 해도 머리를 자르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로 말하자면 난 자네가 무지 의심스럽네. 아니, 의심스럽다기보단 의문투성이일 뿐일세.”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의심은 신뢰성이 떨어집니다.”
“자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아무튼 내 의심 외에는 자네가 수상한 사람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없으니 오늘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오.” 앤드루 경이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클로드. 자네 프랑스에서 온 것 치곤 영어 발음이 꽤 좋군.”
“그렇군요.”
“며칠간 다니엘을 찾아 다녔건만, 꼭 만나야 할 때는 보이지 않는 법이지. 이쯤 되니 반드시 만날 필요가 있소.” 앤드루 경이 말했다. “혹시라도 다니엘을 만난다면 내게 말해주게. 사건에 대하여 몇 가지 진술을 들어봐야 할 것 같소. 살인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바람처럼 사라진 것도 마음에 걸리고 말이오.”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거죠?”
앤드루 경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와 눈을 마주칠수록 내 눈이 따끔거렸다.
“…그렇게 나와야 하겠는가? 아무래도 유족이다 보니 대화를 좀 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그렇네.” 앤드루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싫으면 말게.”
앤드루 경은 뒤돌아 가려고 했다. 가방을 꼭 쥐고 소지품을 욱여넣는 그의 손엔 성한 곳이 없었다.
“가끔 농업을 하시나 보군요.” 내가 말했다. “우중충한 런던에서 피부가 이렇게 타고 훼손되기는 어려울 텐데요.”
앤드루 경이 멈춰서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본가에서 큰형님의 농사를 돕곤 했소.” 그가 말했다.
“무슨 농사입니까?”
“작물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사과라고 답할 수 있네.”
나는 자세를 고쳐 바르게 섰다.
“다니엘을 찾아내는 조건으로 사과 한 박스를 약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제가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 말입니다. 흔쾌히 수락하시면 지금 바로 런던을 싹 뒤지도록 하죠.”
앤드루 경은 한참을 고민했다.
“자네 사과를 좋아하나?” 그가 물었다.
“맛있더군요.” 내가 답했다.
“어려운 건 아니니 그렇게 하지. 나중에 더 많은 걸 바라지는 않겠지.” 앤드루 경이 자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자네는 참 까다롭군. 경찰의 요구에 대가를 바라는 놈은 처음일세.”
앤드루 경은 딱히 기대하지는 않겠노라고 덧붙이고는 이내 뒤돌아서서 돌아갔다. 나는 그의 점점 멀어지는 형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를 주시했다. 그가 어느 건물의 모퉁이를 끼고돌며 완전히 사라지니 이윽고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이 휑한 거리에 검붉은 하늘빛만이 스며들었다.
이런 상황이 흔하거나 평범한 건 아니었다. 불쑥 다른 사람을 찾아와서 하나부터 아홉까지 헛소리만 늘어놓다 가버린 앤드루 경(마지막 열을 세지 않은 이유는, 다니엘을 찾아내는 조건으로 사과를 잔뜩 받는 거래를 이루어내었기 때문이다)은 어쩌면 상황의 심각성을 전달해 주는 매개체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곧 그 살인사건이 다니엘이라는 사람과 관련되어 단순한 소동으로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을 거라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문을 닫고 들어와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 정말 뭐 하다가 잠든 거지? 정말 내게서 술 냄새가 나는가? 어쩐지, 잠에서 깰 때 머리가 아프긴 했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이 집은 어느 사거리, 길과 길이 만나는 모서리에 비스듬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곳이 정말 다니엘의 집이라면, 나는 왜 이곳에 있었던 거지?
집 주변을 돌아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바닥에 깨진 채 위험하게 버려진 술병 몇 개를 발견했다. 이거 내가 마신 건가? 아, 앤드루 경의 말이 맞았던 거라면 난 세상에서 가장 수상한 사람이겠어. 술병 주변에는 피가 튀어있었다. 그리고 난 곧 내 오른쪽 종아리에 커다랗게 남은 흉터를 발견했다. 작은 상처는 아닌 듯 보였다.
난 대체 뭐하던 사람인 거지? 기억이란 것이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끊겨있었다. 기억과 감정을 동시에 잃어버린 무능한 나라는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기대조차 되지 않았다. 마치 다시 태어난 기분, 혹은 어떠한 정보도 없이 다른 세상에 온 기분. 그 순간에 내가 느꼈던 전부였다. 책상에는 고이 놓인 깨진 회중시계와 작은 부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했다. 밖은 해가 마지막 빛을 뿜어대며 노을 지고 있었고, 어두운 집안을 비추는 건 작은 조명뿐인지라 내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난 그 창문 너머로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기력 없이 축 처진 낯선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엉킨 그의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고, 그런 어색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이상하고 묘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곧 시선을 조금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내 눈의 초점이 창문에 비친 내 모습에서 창밖에 있는 거리의 모습으로 옮겨갔다. 해가 지면서 검붉게 얼룩져버린 하늘과 어둑어둑한 거리를 몇 개의 가로등만이 나란히 자리를 지키면서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고 양옆으로 높은 건물들이 들어선 바람에 좁아 보이는 돌 도로가 깔린 거리에는 사람들은 물론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쓸쓸함을 더했다.
온전하지 못한 나의 정신 상태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시야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 시간의 노을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1927년 9월 23일. 저녁부터 시작한 오늘.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의 기억을 잃고 눈을 뜬 오늘을 ‘기억의 날’이라 칭하기로 했다. 회상할 때면, 가장 처음 나와 기억의 문을 여는 날이니까.
밖에서 들리는 보이지 않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내가 조금씩 몸을 움직일 때 들리는 작은 옷 소리만이 내 귀에 나지막이 들려왔고, 때문에, 이 거리는 폐쇄되고 버려졌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 상황에 대한 허무한 의구심만이 금방 삶의 지루함을 느껴버린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모든 기억을 잃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창문 밖에 보이는 건물들의 창문 개수를 세거나 수리가 다 되지 않은 시계를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나는 단숨에 온갖 태엽들이 복잡하게 얽힌 시계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시계가 망가질까 봐 함부로 만지지는 않았지만, 회중시계의 용두를 조심스레 돌리자 복잡했던 시계 속이 더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시곗바늘도 작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교하고 반복적인 딱딱한 소리였다.
의미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던 나의 머릿속엔 온통 앤드루 경이 언급했던 킹스크로스역 살인사건뿐이었다. 현관문을 살짝 열고 나가니 대여섯 개의 신문들이 쌓여있었다. 이 낡은 신문들을 뒤적였다. 며칠이 지난 오늘 자까지도 전부 킹스크로스 살인사건에 관한 기사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앤드루 경이 이 사건을 모르고 있던 나를 걱정스럽게 여길만했다.
[신문 기사 / 1927년 9월 23일 자]
「‘킹스크로스 살인사건, 두 명 사망. 킹스크로스역 일부 봉쇄….’
어제 새벽, 킹스크로스 기차역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인적이 드문 기차역 뒷길에서 일어난 이 살인사건은 두 명 모두 현장에서 발견된 작은 웨블리 리볼버 한 자루로 사망하였다. 각각 복부, 머리에 총상이 있었으며,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살해하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자결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기 위해 런던 광역 경찰청 측에선 역을 장기간 봉쇄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거였구나, 앤드루 경이 그렇게 말하던 게. 신문 뒷면에는 작게 그려진 런던의 지도가 있었는데 ‘킹스크로스역’이 큼지막하게 적힌 것을 보면 이 기차역이 나름 이 도시의 상징물임을 알 수 있었다.
*
해는 이미 지고 거리에는 어둠이 드리웠다. 나는 그 길로 나왔다. 왜 내가 킹스크로스역으로 향하고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 기억났다. 앤드루 경에게 먼저 제안을 한 건 나였지. 그땐 너무 배고파서 그랬다. 아는 것도 없고 다니엘이 누군지 유추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기에 사과를 받는 것은 일찍이 포기했어야 했나. 어쩐지 제안을 수락하는 앤드루 경의 표정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다니엘의 누나가 살해된 기차역에 가면 다니엘을 만날 수 있을 거란 단순하고도 간단한(다르게 말하면 무식한) 결론을 냈다.
신문 뒷면에 삽입된 작은 지도가 전부였다. 지도를 보며 기차역으로 향했다. 초행길이었으나 얼마 안 가 멀리서부터 그 형체가 보이던 탓에 지도는 딱히 필요가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 건물이었다.
밖은 처음 눈을 떴을 때보다 비교적 더 어두워졌지만 그런 것 따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봉쇄되었다는 기차역에 들어가려면 지금 시간이 딱 좋았다.
살인사건 현장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덕에 어둡고 한산해진 기차역의 출입문은 하나같이 굳게 닫혀있었다. 정문 광장에는 경비가 삼엄했다. 나는 그들을 피해 기차역 외각을 따라 정문에서 멀어졌다. 빨간 벽돌이 빈틈없이 올곧게, 혹은 매정하게 쌓여 이룬 거대한 벽이 끝없이 이어졌다. 반복되는 거대한 아치형 창문에서는 이질감이 들었다. 이유는 없었으나 나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것은 마치 흰자위가 없는 여러 눈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어두운 하늘이 원인이었으리라. 외각을 두른 도로는 뻥 뚫려있었지만, 가끔 저 멀리에서 거리를 거니는 경비가 보일 때면 곳곳에 배치된 검은 가로등(불은 들어오지 않았다)과 쓰레기통에 대충 몸을 숨겼다. 아니, 어두운 옷을 입고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것이었고, 그 투박한 모습이 길바닥에 제멋대로 나뒹구는 쓰레기통과 닮아 경비들이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지루하게 펼쳐진 벽에 홀로 자리를 지키는 어떤 검은 사각형. 그것은 작은 후문이었다. 주변에는 경비가 없었다. 살짝 힘을 주어 밀자 문은 소리 없이 그대로 열렸다.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경비는 없었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기차역에 잠입했다. 기차역은 외로웠다. 외벽 한편에 철로를 가로막고 있는 잔해들과 보수공사의 흔적들 또한 살인사건 현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기차역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내부는 거대했지만 아무도 없어서 너무나 휑했다. 약간의 달빛만이 천장의 창틈을 타고 들어와 비추는 어두운 기차역에는 운영이 중단된 증기기관차만이 고독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기차역에는 살인사건 현장을 찾아 돌아다니는 내 일정한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일자로 길게 뻗친 보도블록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봉쇄되기 전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시끄러운 이곳의 모습을 상상했다.
길게 이어진 탑승구를 둘러싼 긴 벽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어둡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그 길을 홀로 걸었다. 어느덧 통로의 끝, 뒷길로 이어지는 작은 틈새에서 밝지 않은 빛이 새어 나와 그 주위를 밝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두컴컴한 이 기차역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작은 빛은 조용히 아른거렸지만, 그것만으로 막대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곳에는 실외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실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막힌 천장이 없는 좁은 뒷길이 펼쳐졌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빛은 그들의 랜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중요한 것을 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봉쇄되고 출입이 불가한 기차역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걸 보고 그들이 상당히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고 멋대로 판단했다.
난 그들과 나 사이에 벽 하나를 두고 머리를 빼꼼 내밀어 그들이 하는 것을 엿보았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그냥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구석진 공간 가장자리에 각자 자리를 잡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있었다. 그리고 양측에서 거만하게 어깨를 펼치고 나온 두 사람이 중앙으로 걸어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돈부터.”
“10파운드라 했나.”
문신이 가득한 남자가 돈을 요구하자 까마귀 가면을 써 얼굴을 가린 여자가 짤랑거리는 돈주머니를 건넸다. 돈주머니는 꽤 컸다.
두 무리 중 한 무리의 사람들은 전부 비슷한 문신과 촌스러운 옷차림을 입고 있었다. 다들 목과 허리는 구부정하게 휘어 있었고, 작업을 마치고 나오며 작업환경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배관공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문신으로 전신을 뒤덮은 깡패들이었다.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전부 허리를 꼿꼿이 펴고 깔끔한 코트 차림에 까마귀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두 부류의 사람들을 구분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계속 이야기했다.
“의사 신상정보랑 모르핀. 신상정보는 어렵게 구했어.” 문신이 가득한 남자가 능글맞은 말투로 말하며 까마귀 가면을 쓴 여자에게 큰 서류 가방과 작은 봉지를 건넸다. 봉지 안 작은 유리병엔 짙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나는 그들이 뒤이어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모르핀이 더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까마귀 가면을 쓴 여자가 그에게 물었다. “돈 많아?”
“직접 만들었어. 긴 세월의 투자가 빛을 발한 거지.”
“지랄하네. 이걸?”
“먹지는 마. 부작용이 좀 있는데 좀 치명적이여.”
“진짜가 아니구나.” 가면을 쓴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언젠간 온몸에 구멍이 뚫려서 죽지만 시간이 좀 걸려서 상관없어. 오랫동안 앓을 뿐이지. 진품이랑 차이가 없어서 진짜인 척 팔면 꽤 쏠쏠하게 벌 수 있더라고.” 그가 답했다. “만드느라 고생 좀 했어. 진짜 진통제라고 해도 절대 몰라.”
“이런 걸 가져올 거면 미리 말했어야지.”
까마귀 가면을 쓴 여자의 목소리가 그 안에서 울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우면서 동시에 절도 있는 것이 은근히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우리 쪽은 지역 경찰이 또 단속을 시작했어. 치한은 까다로운데 남는 재고는 많아서 말이여.” 문신 가득한 남자가 액체가 담긴 병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아깝잖아.”
“대신 팔고 돈을 달라는 거잖아.”
“나누자는 거지. 흑향기Gottes-Raff가 유일한 길인 거여. 런던에서는 그렇게 엄격하게 단속하지 않더라고.” 그가 까마귀 가면을 쓴 여자를 설득했다. “니들도 좋으면서.”
문신한 남자가 까마귀 가면을 쓴 여자에게 건넨 약물은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을 모방한 싸구려 약물이었다.
누군가의 신상정보, 독성 약물, 10파운드라는 거대 액수의 돈. 그 순간 내 본능은 내게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문신으로 피부를 갈아엎은 남자는 여자를 계속해서 꼬드겼다. 까마귀 가면을 쓴 여자는 이 또 다른 거래에 수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남는 게 있어야지.” 문신한 남자가 말했다.
거래를 마무리하는 그들 주위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아까는 못 봤는데 다들 권총을 한 자루씩을 지니고 있었다. 거래가 끝나자 그들은 다시 서로를 경계하며 여차하면 소동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난 이곳을 빠져나와 기차역의 다른 곳을 뒤져 살인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찾으려 했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한 시간은 오후 일곱 시 사십 분이었다.
그때 그들 중 하나가 내 쪽으로 다가오려는 조짐을 보였다. 난 급히 벽 뒤로 몸을 숨겼지만 다가오는 발소리는 점점 커졌다. 나는 조용하지만 빠르게 걸음을 옮겨 어두운 창고로 들어가 바닥에 엎드렸다. 그는 얼굴을 내밀더니 주위를 살폈다.
그때 다리에 무언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아, 실수였다! 쌓여있는 짐 더미를 건드려버린 것이었다. 짐 더미가 큰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가 선명히 보였다.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을 기었다. 짐 더미 사이로 기어들어 가 어둠 속에 모습을 숨겼다. 창고로 들어온 그가 날 찾지 않길 바라며 조용히 숨죽였다. 그는 권총 대신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창고엔 출입문이 하나였다. 그가 문 주변을 서성이던 탓에 꼼짝없이 갇혀버리게 된 것이었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는 너무나 컸다. 혹여나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가슴을 꽉 붙잡았다. 이마에서 땀이 잔뜩 흘렀다. 어둠에 휩싸인 공간 속에서 나는 그의 발소리에 집중했다. 내부는 공포와 긴장으로 가득 찼다. 그는 낫을 치켜세워 들고는 창고를 배회했다.
이윽고 그가 창고에서 나가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계속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바깥의 풀벌레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해지고 나서야, 나는 그가 갔음을 확신하고 창고를 빠져나왔다.
난 집에 가기로 했다. 다니엘이 이곳에 있을 거라는 작은 확률에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도 벌써 며칠이나 되었다는데, 이곳에 온 건 거듭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때 날카로운 낫이 내 목을 감쌌다. 젠장, 낫을 들고 나를 찾던 그였다. 분명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숨어있었는데, 그걸 기다렸다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 붙어버렸다. 마음이 혼미해졌다. 두려움이 다시 밀려왔지만 이미 도망가기에는 늦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내 뒤에 서서 낫을 더 바짝 붙였다. 차가운 날이 살갗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날 노려보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난 왼쪽 귀 옆으로 보이는 까마귀 가면의 부리가 심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총도 없이 조그마한 낫을 들고 다니는 게, 가만 보니 신참이었구나. 난 그대로 힘껏 다리를 들어 발로 그의 발등 위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뒤로 넘어지듯 등으로 그를 밀어버리니 그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 것이었다. 난 그를 발로 한 번 걷어찬 다음 도망쳤다. 복부를 얻어맞은 그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고통의 비명이 아니라 조직원들을 부르는 소리였다.
때문에, 까마귀 가면을 쓴 무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복잡한 역 내부, 출구를 찾지 못해 보이는 길로만 달렸다.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건물 외곽에 있는 좁은 통로를 통해 벽에 난간 없는 철제 비계까지 올라갔다. 꽤 높은 곳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저 멀리서 총을 쥐고 떼거리로 몰려오던 까마귀무리가 바로 밑에서 사다리를 붙잡았으니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계는 심하게 덜컹거렸다. 위로 올라가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까 전 그 창고처럼 꽉 막힌 공간일 경우, 이번엔 확실하게 죽게 될 것이었다. 까마귀들은 바짝 쫓아왔다. 사다리를 다 오르자, 나는 절망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뛰어내리자니 너무 높은 탓에 곧바로 죽어버릴 것은 뻔했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그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곳으로 들어가 다시 커다란 상자들을 보관한 보관함 사이에 몸을 구겨 넣고 어둠 속에 숨었다. 바닥에 엎드렸다. 이번엔 정말 앞이 보이지 않아 열심히 더듬느라 날카로운 어떤 것에 손을 베여버리고 말았다.
아슬아슬한 철제 비계로 이루어진 높은 복층에는 그 남자를 포함한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빠르게 올라왔다. 그들이 전부 올라와 출입구를 가득 메우자, 출입구에서마저 빛이 안 들어왔다. 어두움에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비좁고 어두운 그곳에서 떠도는 가죽 냄새와 땀 냄새가 코를 찔렀고, 시끄럽게 울리는 발소리가 숨통을 조여 왔다. 그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먼지 쌓인 공기를 들이마시면서도 꾸역꾸역 나오려 목을 두드리는 기침을 참아내는 것이었다. 커다란 엄폐물에 몸을 가리긴 했지만, 기침이라도 하는 순간엔 바로 발각될 테니까.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참았다. 따가웠다.
“봤겠지.” 어느 여자가 중얼거렸다.
“랜턴부터 다시 켜.”
그들이 쓴 까마귀 가면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난 가만히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들 중 하나는 너무 어두워서 나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빨리 켜.”
“기다려 봐, 안 보여.”
“누구였어?”
“모르겠어.” 내 목에 낫을 들이민 그 남자였다. “얼굴은 기억해뒀어.”
나는 고개를 내밀어 그들을 지켜보았다. 어두움에 적응한 눈으로는 그들의 실루엣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하는 듯했다.
그때,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더 깊은 어둠 속에 있던 누군가였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질러버릴 뻔했다. 나는 잔뜩 겁에 질렸지만, 손으로 더듬어 까마귀 가면을 쓰지 않은 그의 얼굴을 만져보고 나서야 그가 저 조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속삭이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의 피부는 푸석푸석한 양피지, 혹은 굳은 밀랍의 촉감이었다.
〚내 얼굴 좀 그만 더듬어.〛
“누구야?” 너무 어두운 나머지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손으로 그의 존재를 확인할 뿐이었다. 건조한 피부와 긴 머릿결이 만져졌다. 나는 그가 얼굴 전체에 화상을 입고 피부가 손상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 잊은 거 맞지? 좋아.〛
그는 내 팔과 어깨를 잡으며 나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사람이 내 팔과 어깨를 잡는다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었다.
〚클로드, 반가워서 그랬어. 놀란 거야?〛
“우리 아는 사이야?”
〚…서운하다 참.〛 그가 실실 웃었다. 〚그래도 잘된 거야. 영국에 온 걸 환영해.〛
그의 존재는 소름 끼쳤다. 그 옆에 있는 것이 과연 안전할까, 의심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밖에 나가면 확실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어둠 속의 그가 가만히 있기를 바라며 잠자코 있었다.
“뭐라는 거야.”
〚잠시만.〛
그가 엎드려있는 내 위로 지나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내 종아리뼈를 발뒤꿈치로 밟는 바람에 비명이 터지려 했지만,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참아냈다. 그가 까마귀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려고 그러는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까마귀들의 비명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한껏 예민해진 소리에 귀가 따끔거렸다. 덜컥 겁이 났다. 어둠 속에서 위협을 느낀 것이었다. 왠지는 몰랐다.
그들은 허겁지겁 랜턴에 붉은 불을 붙이려 했다. 물론 불이 켜지자마자 랜턴은 와장창 깨졌지만,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비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잠깐 번쩍인 불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마치 플래시 라이트와 함께 각인된 사진처럼, 다시 어둠이 내리자 머릿속에 깊게 남아버렸다. 혈색이 없고 탁한 피부색에 가슴까지 내려오는 어둡고 지저분한 머리카락, 뚜렷하지 않은 형체.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칠흑같이 어두운 그의 눈이었다. 누구든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밝은 빛이 번쩍이던 와중에도 그의 눈은 어두웠다. 외형조차 기괴한 그는 아무리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사과 따듯 조직원들의 목을 하나둘 비틀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런 사람이 방금까지 내 옆에 있었다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기어코 다시 랜턴에 불을 붙인 누군가가 모두를 비췄다. 나도 집중하여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정적이 흘렀다. 천장 지지대 위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비명과 숨이 턱턱 막히는 소리가 어울리는 아비규환이었다.
그들은 놀랐는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출구를 찾아댔고, 랜턴은 심하게 흔들려서 분위기를 더욱 압도했다. 사람이 하나둘 죽어갈 때마다 격한 몸부림의 진동이 차가운 철제 비계를 통해 내 다리에 전달되었다. 총은 통하지 않았느냐고? 그게 통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두워서 맞추지를 못하는 것인지 서너 발의 총성이 있고 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 사태를 보고 그들은 살기에 급급해졌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는 긴 팔을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고, 그 손에 붙잡힌 사람들은 족히 10초 정도면 의식을 잃었는데, 그들의 목엔 하나같이 커다란 손자국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그가 손으로 낚아챈 랜턴은 망가지는 짧은소리를 내며 마구 깜빡이다가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꺼졌다.
그 사이,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총을 꺼내어 그에게 다시 마구 쐈다. 하나 그 어둠 속에서 존재조차 불투명한 그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비명과 총소리 아우러지는 정신 나간 상황 속, 미친 듯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랜턴이 조용히 불빛을 뿜어냈다. 마지막 조직원의 목까지 비틀어지고 나서야 상황은 조용해졌다. 장발(이름 모를 그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긴 머리카락이었다)은 헝클어진 긴 머리칼을 다듬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벽 뒤로 다시 몸을 숨겼다. 소름 끼치는 발소리를 내며 가까이 온 장발은 갑자기 내 팔을 잡고는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 조금 저항했으나,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그가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힘들면 좀 쉬자.〛 어째서인지, 장발은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난 왜 안 죽인 건데.”
〚넌 해야 할 게 있거든.〛 장발이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아무도 안 죽였어. 기절한 것뿐이야.〛 태연하게 말하는 장발의 뒤로 미동도 없는 수많은 송장이 쌓여있었다.
“혼자서 다 죽인 거야?”
〚아직 안 죽었어. 그리고 몇 명은 도망쳤어.〛
“너 사람 맞아?”
〚네가 살아있다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비명으로 즐비했던 이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왜 그런 거야?”
장발은 말 대신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가방을 내게 보여주었다. 두 조직이 거래하던 거래상품이었다.
“이게 갖고 싶었어?”
나는 가방을 열어보았다. 커다란 가방에 작은 종이 하나가 바람에 조용히 펄럭였다.
「[신상정보]
이름 - 그레이스 리디아 아나리스(영국)
생년월일 - 1898년 4월 30일 / 29세
혈액형 - A
키, 몸무게 - 5' 4''(164센티미터), 48킬로그램
주거지 – 워프데일Wharfdale 로드 62번지 4호 연립주택 2층
직장 - 발프 스트리트Balfe st 33번지 발프 병원
가족 사항 - 아버지, 어머니, 남자 형제
약혼자 - 조지 로르칸 타디어스; 발프 병원 소속 외과 의사
기타 장애 및 질병 - 해당 사항 없음.
[주요 사항]
1923년 킹스칼리지 대학교 의학과 졸업
1926년 발프 병원 내과 의사로 부임
1927년 약물을 사용한 살인 전적 있음(르노라 부인 – 유사 모르핀 중독 사망사건).
[기타 사항]
단도 사용 시: 심장 및 복부-3초 / 쇄골하동맥-2초 / 상황에 따라 옆구리나 허벅지를 깊게 찔러도 됨.
지난 다섯 달간 매일 8시, 12시, 20시에 혼자 발프 스트리트 뒷골목에 10분간 갔다 오는 것이 확인됨. 발프 스트리트 뒷골목에서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생물체가 혼자 거주 중인 것이 확인됨. 그것은 가까이 가면 유해하니 주의하길 바람.
매주 월, 화, 수, 목, 금, 토(주 6일) 근무. 10시 출근, 22시 퇴근.
오류 발견 시 재차 확인 바람.」
“자세하게 적었네.”
〚발프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야. 흑향기가 이 여자를 죽이려는 거야.〛
“흑향기?”
〚얘네들.〛 장발은 엉망이 된 지지대 위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반송장을 가리켰다. 〚단체로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들이지. 여러모로 문제가 많아.〛
장발은 나를 데리고 발프 병원이 있는 발프 스트리트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누군가를 살리려고 거기까지 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왜?”
〚범죄는 예방하는 거야. 그녀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기만 하자는 거야. 우리만 아는 사실이잖아.〛
“혼자 가.”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혼자서도 잘하더니만.”
〚네가 있어야 해. 따라오기만 해.〛
“나랑 하나도 관련 없는 사람 살리겠다고 스스로 이 일에 끼어들자고?”
장발은 내 옷을 움켜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장발의 손을 뿌리쳐내려고 시도했지만, 그가 너무나 세게 잡은 탓에 장발의 손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어디 가?”
〚발프 병원.〛
“싫다고 했잖아. 나 해야 할 게 있다고.”
나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저항하지 않고 장발의 손에 이끌려 발프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천장 지지대에서 내려왔다. 기차역을 찾아온 것이 후회됐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었다.
그때 이런 내 마음에 기름을 붓는 것인지 이내 누군가가 손전등으로 나와 바로 옆에 있던 장발을 비췄다. 기차역을 순찰하던 어느 젊은 경비였다.
“기차역은 봉쇄되었는데 말이죠.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나는 곧바로 동그란 안경을 쓴 경비의 이 질문이 순순히 궁금해서 한 것이 아니었을 알아챘다. “여기서 뭐 하셨어요? 꾸밈없이 솔직하게 답해주시죠.”
경비는 나를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물었습니다, 여기서 뭐 하셨냐고.”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 그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나는 어색하게 장발과 경비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장발도 시선을 좀처럼 한곳에 두지 못하고 무안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조용한 기차역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음…,〛 장발이 무엇이라도 생각해냈는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궁금하지 않습니다. 들어온 목적과 무얼 했는지 물었을 뿐입니다.” 경비는 눈가에 힘을 주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진술하지 않으신다면야. 법대로….”
“잠시만요, 이 사람이 제일 수상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장발을 가리키며, 경비에게 말했다. “저 좀 살려주십시오. 이 사람이 저를 이상한 데로 끌고 가려고 한단 말입니다.”
경비는 반응이 없었다. 아니,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로 흉측하게 생긴 장발의 모습을 보고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게 정상이었던가. 경비는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신과 치료 이력이 있으신가요?” 경비가 내게 되물었다. “그 흰 셔츠는 환자복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경비와 장발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경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대는 선택하셔야 하겠지요, 내일 아침 서에 소환되거나, 여기서 벌금으로 끝내거나.”
〚벌금, 그거 좋네요.〛 장발이 끼어들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즉시 체포가 원칙이긴 하지만 당신만 골치 아파질 겁니다. 상부엔 제가 보고하도록 하죠.” 경비가 말했다. “인당 50펜스입니다.”
장발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너도 꺼내.〛
“돈 없는데.”
〚내일까지 갚아.〛
장발은 지갑에서 총 100펜스를 꺼냈다.
“50펜스만 걷죠.” 경비는 내민 동전 중 10펜스 동전 다섯 개만 능숙하게 골라 챙겼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군요.”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나가지 않는다면 다시 체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경비가 걷은 벌금을 자기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보란 듯이 출구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보니 경비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얼른 나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어느 정도 출입문 밖으로 나가자 그는 다시 돌아서서 순찰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장발은 여전히 나를 소름 끼치는 몰골로 졸졸 따라왔다.
“원래 두 가지 선택지를 주는 거야?”
〚저 인간이 썩은 거야.〛 그가 작게 소리쳤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하늘이 어두워졌다. 발프 병원으로 향하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건물마다 굳게 닫혀있는 창문들은 이 늦은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는 나를 비웃었고, 아무도 없는 이 거리는 마치 폐쇄된 도시 같은 느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