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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형 Feb 28. 2024

나와 무관한 어느 노동자의 죽음, <만세전>




“그러니 촌의 젊은 애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계집애들까지 나두 나두 하고 나서거든. 뭐 모집이야 쉽지!”     



몇년 전 이야기입니다. 유명 대형마트의 노동자 두 명이 연이어 세상을 뜬 일이 있었습니다. 21살의 청년은 무빙워크를 수리하던 도중 그곳에 끼어 목숨을 잃었지요. 사흘 뒤엔 48살의 여성 계산원이 가슴통증을 호소하다가 쓰러졌습니다. 이렇게 둘은 자신의 일터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이 사건은 뉴스에 잠시 나왔다가 금세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정치인이나 기업가, 혹은 유명 연예인이 아니었으니까요. 속보가 뜨고, 뉴스 포털을 가득 채우고, SNS에 회자될 죽음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어른이 되면서 여러 죽음들을 봅니다. 사람이 죽는 건 드문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저승의 문턱을 넘고 있으니까요. 아침 신문과 저녁 뉴스엔 죽은 사람 천지잖아요. 하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면 그건 죽음이 아닌 ‘사건’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타인의 죽음에 점점 무감해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염상섭.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사진을 보면 그의 동그란 안경이 떠오를지 모르겠네요. <삼대>나 <표본실의 청개구리>, <두 파산> 같은 그의 대표작까지 기억난다면 대단한 거고요.


그가 쓴 <만세전>이란 작품에서 ‘만세(萬歲)’는 뭔가 좋은 단어처럼 느껴지지만, 실상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前)’에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잠시 살펴보지요.

     


주인공인 ‘나’는 일제 강점기의 일본 유학생이었습니다. 대단한 지식인층이었지요. 어느 날 ‘나’는 고국에 있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귀국하기로 결정하지요. 그래도 마음은 그리 급하지 않았나 봅니다. 이발소도 들르고, 옷도 사고, 카페에 들어 여종업원과 술을 마시면서 수작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오르면서 ‘나’의 상황은 바뀝니다. 형사의 심문을 받고 검색을 당하면서 ‘나’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지언정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지요.

   

작품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은 배 안의 목욕탕에서 벌어집니다. 이곳에서 ‘나’는 두 일본인의 대화를 엿듣게 되는데요. 그들은 노동자 모집원으로, 조선인을 일본 각지에 팔아넘기는 일을 하고 있었지요.

      

“실상은 누워 떡 먹기지. 나두 이번에 가서 해 오면 세 번째나 되오마는, 내지(일본)의 각 회사와 연락해 가지고 요보(조선인을 멸시하여 이르는 말)들을 붙들어 오는 것인데, 즉 조선 쿨리(막노동꾼) 말씀요. 농촌 노동자를 빼내 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대개 경상남북도나 그렇지 않으면 함경, 강원, 그 다음에는 평안도에서 모집을 해 오는 것인데, 그중에도 경상남도가 제일 쉽습넨다, 하하하.”

     

그 교활한 웃음소리에 ‘나’는 깜짝 놀랍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그의 세 치 혀에 속아 지옥 같은 일본 공장과 광산으로 팔려나가는 게 엄연한 현실이었으니까요. 들뜬 그는 계속 떠들어 댑니다. 천 명만 데려와도 이천 원은 손쉽게 벌어들이니, 세상에 이런 벌이가 어디 있냐고요.

 

그의 말을 듣던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몸을 부르르 떱니다. 그리고 모멸감과 분노를 느끼지요. 그전까지는 고국도, 조선 사람도 생각해본 적 없는 ‘나’가 각성하는 순간입니다.


            

문득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제게 십 대는 경쟁의 나날이었습니다. 우정과 추억도 있었지만 시험 성적 앞에선 냉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대학 진학은 모두의 지향점이자 최우선 순위였습니다. 기업이 파산하고,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하고,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빚에 허덕이고, 온 세상이 잿빛으로 덮인 IMF 시대였기에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이십 대는 각자도생의 시기였습니다. 어떻게든 안정된 자리를 잡아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거라 믿었지요. 대학 열람실은 토익책과 공무원 수험서로 가득했습니다. 군대에 가 있던 시간들도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릅니다. 세상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나만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삼십 대는 치열함의 순간이었습니다. 운 좋게 교직이라는 안정된 밧줄을 잡았지만, 그게 모든 걸 만족시켜주진 않았습니다. 집도 필요하고, 차도 필요하고, 옷도 필요했지요. 아이가 커갔고, 돈도 들어갔습니다. 오르는 부동산 뉴스를 보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왜 이대로일까?’ 되물었지요. 그러면서도 결론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치열하게 살지 않은 것.’ 정답 같지도 않은 이 어정쩡한 결론으로 자문자답하면서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했습니다.


살아남는 게 미덕인 삶. 이런 삶을 살아왔으니 타인의 죽음 – 그것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노동자의 죽음에 무관심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떨어져 죽은 청년이나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 하는 노동자들의 사연은 제게 먼 나라 이야기였지요.     

 


어느 날이었습니다. 밤 11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지요. 불 꺼진 방에서 잠든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훌쩍 커 있었지요.  

어른의 역할이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아닐까요? 어쩌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형 옆에 꼭 붙어 자는 동생을 보면서 그랬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건 내 아이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래야지요. 적어도 지하철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떨어져 세상을 뜬 19살 청년이 나오지 않아야겠지요. 이웃의 통곡엔 귀를 틀어막고 내 행복만을 찾는 게 무의미한 것처럼요.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보지요. 부산에 도착한 스물 세 살의 ‘나’는 점점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나’는 배웅 나온 형이 총독부 법에 의해 공동묘지밖에 쓸 수 없게 되었다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한심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조선 전체가 '묘지' 같은데 그런 걱정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우여곡절 끝에 ‘나’는 서울에 도착하지만 아내는 이미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간단한 수술로 나을 수 있는 병이지만,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한약으로만 치료하다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결국 아내는 세상을 뜹니다. 장례를 치른 ‘나’는 질식할 것 같은 집을 떠나 다시 일본으로 가는 길에 오르지요. 작품은 이렇게 끝납니다.     

본래 이 작품의 원제는 <묘지>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지요. 음침하고, 우울하고, 아픈 사람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결국 목숨을 잃은 아내. 이런 상황에서 나 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각성’은 하지만 ‘실천’은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그곳을 떠납니다. 이 작품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껏 많은 이가 그랬습니다. 살면서 보고 싶은 건 바라보고, 보기 싫은 건 외면했지요. 인식은 하지만 행동하지 않았고요. 다들 그렇게 살아왔기에 무관심 속에서 부조리는 점점 자라지 않았을까요? ‘무빙워크 인명사고는 용역업체의 책임이다.’, ‘아프면 대신 일할 사람을 구해오라.’며 대형마트가 당당히 주장한 것처럼요.(몸이 좋지 않았던 계산원은 당시에 휴무였던 동료 넷에게 부탁했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다섯 번째 전화를 걸지 못한 채 결국 쓰러졌습니다.)      


만세 부를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만세'전'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불행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타인의 죽음에 통곡하며, 이 사회의 불합리함에 당당하게 맞설 그날은 언제 올까요? 우리가 진심으로 만세를 부를 그날 말입니다. 사십 대가 된 이제는 좀 더 세상에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냉소적, 방관적 태도의 작품 속 주인공과는 다르게요. 우리 사회가 '묘지'가 되진 말아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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