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겪는 건 비참하지만, 비극을 관찰하는 건 인상적인 일입니다. 스파르타의 왕비 헬렌을 사랑한 파리스,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사랑한 안나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조신전> 역시 오랫동안 제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조신전>은 통일신라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강릉의 세규사(世逵寺)라는 절을 배경으로 하는데요. 절에는 보통 장원(莊園)이라는 토지가 딸려 있어요. 주인공 조신은 이 장원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승려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그 지역 태수의 딸이었는데요. 스님과 태수의 딸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지요. 하지만 승려도 사랑 앞에선 어쩔 수 없던 것일까요? 마른 들풀에 불이 번지듯, 조신의 마음은 그녀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가득 찹니다. 그는 몇 번이나 관음보살에게 찾아가 남몰래 기도를 드리죠. 그녀와 살게 해 달라고요.
하지만 부처님은 기도를 듣지 못한 걸까요? 얼마 후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 버리지요. 조신은 불당에 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며 부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는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깜빡 잠이 들어 버리죠.
그런데 기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꿈속에 여인이 기쁜 얼굴로 다가와 조신에게 웃으며 말을 겁니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마음속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딴 사람에게로 시집갔습니다. 지금 내외가 되기를 원해서 온 것입니다.”라고요. 간절한 기도가 부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걸까요? 조신은 무척 기뻐하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야반도주하지요.
신분으로도, 경제적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금지된 사랑의 시작입니다. 이들은 40년간 함께 살며 다섯 자식을 두지요. 행복했을까요? 아니요.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난했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거리에서 구걸하며 다닙니다. 말 그대로 유리걸식(流離乞食)이지요. 이렇게 십 년을 정처 없이 떠돌면서 옷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몸도 가릴 수 없습니다.
명주 해현령을 지날 때 15살 큰아이가 배고픔을 못 견디고 쓰러져 죽습니다. 가족들은 통곡하며 아이를 길가에 묻었지요. 이들은 길가에 초가집을 짓고 삽니다. 조신 부부는 이미 늙고 지치고 병들었어요.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날 힘조차 없습니다. 열 살 딸아이가 밖에 나가 밥을 빌어먹다가 마을 개한테 물렸습니다. 아픈 것을 부르짖으며 옆에 와 누었는데 부부는 목이 메어 눈물만 몇 줄기 흘릴 뿐입니다. 이제 부인은 눈물을 씻으며 조신에게 말합니다.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먹었고 옷도 나누어 입었으니 가히 두터운 인연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병이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닥쳐오는데 수많은 문전에서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산더미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워하고 배고파해도 미처 돌봐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사랑이 있어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와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조신은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듣고만 있죠. 아내의 말은 계속됩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서 더 누(累)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은 차라리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행하고 그치는 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말을 따라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은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각각 아이를 둘씩 데리고 아내는 고향으로, 그는 남쪽으로 가기로 하지요. 서로 작별의 길을 떠나려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깹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은 여전히 깜박거리고, 시간은 밤을 지나 새벽이 되고 있네요. 수염과 머리털은 새하얗게 세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은 허탈함과 망연함 밖에 남지 않았지요.
조신은 관음보살상을 대하기가 너무나 부끄러워졌습니다. 꿈에서 큰아이를 묻었던 자리를 파보니 돌미륵이 나왔지요. 그는 그걸 정성스레 씻어 근처에 있는 절에 모십니다. 그리고는 장원을 맡은 책임을 내놓고 사재를 털어 정토사(淨土寺)를 지은 뒤 불도에 전념합니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었지요.
-----------------------
학창시절의 저는 조신을 마냥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아니, 스님이 왜 저런 일을 벌였대?’, '뒷감당 어쩔....?'이라고 생각했지요. 비극은 잘못된 선택에 따른 필연적 책임이라고 여겼어요. 작품의 결말을 보며 ‘역시 불교적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인가… 인생무상이로군.’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니 작품이 보니 조금 달라 보였습니다. 일단은 ‘예나 지금이나 돈이 중요하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답니다. 동냥 다니던 딸이 개에게 물려 울부짖고 그 모습을 본 부부가 목이 메어 눈물만 흘렸다는 구절을 볼 땐 특히 마음 아팠습니다. 최소한 자기 자식이 먹고 싶어하는 걸 먹게 해주는 게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겁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수많은 부모들이 힘든 걸 참아가며 묵묵히 일하는 것이겠죠. 관심의 우선순위가 현실적으로 바뀐 셈입니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조신에 대한 평가입니다. 조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단순히 비난만 할 수 있을까요? “그는 잘못된 욕망을 가졌어. 그러니 망할 수밖에 없었지.”라고요? 글쎄요. 지금까지 조신 같은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 이들. 한순간에 실패자로, 인생 낙오자로, 자신의 모든 걸 잃고 결국 몰락한 이들.
그들의 욕망을 무턱대고 비난하고 싶진 않습니다. 세상에 욕망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사실 그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인생이라는 바다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일지언정, 그 아래에는 폭풍우를 견디지 못해 수장된 난파선들로 가득하다는 걸 어른이 된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를 비난하기보단 안타까워하고 싶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연민의 감정이 앞섭니다.
<조신전>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연 스님도 역시 같은 생각이었나 봅니다. 그는 작품 말미에 시 한편을 써놓았지요. 교과서엔 나오지 않은 부분입니다. 조신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달콤한 한 시절도 지나보니 허망하네.
나도 몰래 근심 속에 이 몸이 다 늙었네.
허무한 부귀공명 다시는 생각 마오.
괴로운 한평생이 꿈결인 줄 알리니.
착한 행실 위해서는 마음부터 닦을지니
홀아비는 미인을, 도둑은 재물을 꿈꾸네.
어찌 가을 밤 푸른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을 꿈꾸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