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어느 날 새벽, 엄마는 며칠간 지속된 심한 복통 끝에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셨다. 길고 많은 검사 끝에 가족들에게 통보된 것은 췌장암 말기. 다음 날 응급 수술에 들어가야 하니 보호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단다. "췌장암 같은 내장암은 증세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발견했을 때는 말기인 경우가 많고 다른 장기에 전이가 되어 수술 예후도 좋지 않고........ "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걸 경험했다. 엄마에게는 차마 얘기할 수 없어서 그냥 수술을 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다고만 했다. 간호사이셨던 엄마는 무언가 예감을 하신 듯했다. 수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으시고 통증이 심하다며 진통제만 요청하셨다.
아버지의 지인이신 병원장께서 수술 후 병실로 오셨다. 엄마는 아직 중환자실에 계셨는데, 의사는 수술 예후가 좋지 않다 했다. 위, 간 등 내부 장기에 암세포가 너무 많이 퍼져서 다 제거하지 못하고 닫았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길어야 40일.
엄마는 아프실 때가 많으셨다. 매년 건강검진을 하셨지만 뚜렷하게 병명을 찾지 못했다. 병원에 다녀오시면 늘 "난 너무 아픈데 의사들은 검사결과에 이상이 없단다" 하셨다. 증상은 있으나 병명은 없는, 지금의 나와 비슷하다. 수술 후 엄마는 2년 6개월을 더 우리 곁에 계셨다. 1년 6개월은 살얼음을 걷는 듯했지만 그래도 일상적인 삶을 사셨다. 수술 다음 해에 자신의 책임을 다하시고자 3월과 10월에 서둘러 두 딸의 결혼식을 치르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자 한 달간 기도원에 계시기도 하셨고 억울한 삶을 보상받고자 큰 이모님과 유명 디자이너를 찾아가 옷과 신발을 맞추기도 하셨다.
삶의 작은 행복을 조심스럽게 훔쳐보려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복수가 차고 통증이 심해서 1년간 입퇴원을 반복했고 마지막 두 달은 병원에서 모르핀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셨다. 눈앞에서 꺼져가는 엄마의 숨결을 인정할 수 없었던 우리는 알부민을 놓아가며 그렇게 엄마의 가는 길을 완강하게 막았다. 그땐 몰랐다. 그게 엄마에게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이었는지... 우리는 그렇게라도 엄마를 놓기 싫었던 것이지만 엄마는 존엄성조차 존중받지 못하는 상태로 그렇게 두 달여를 사셨다. 추석 연휴 첫날 다행히 온 가족이 함께 한 자리에서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 누군가 그랬다. 사망하셔도 영혼은 잠시 육체에 머문다고. 그래서 목 놓아 울고 있는 가족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고는 마지막 한 마디씩 엄마에게 이야기하게 시켰다. 그렇게 가셨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모르핀 최대치를 맞아 의식이 없으셨지만 간혹 정신이 돌아오시면 집에 가고 싶다고 그렇게 간절히 원하셨다. 27살이었던 나는 집에 가면 돌아가실 것 같아서 안된다고만 했다. 병원에 계시면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집으로 모시고 오지 않았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얼마나 병원이 싫으셨으면 그러셨을까. 집으로 모시고 왔어야 했다.
엄마는 대가족 살림을 뚝딱뚝딱 해 내셨고 무엇이든지 엄마의 요리는 맛이 있었다. 약밥을 배웠다. 엄마가 참 좋아하셨고 잘 만드셨던 약밥. 어릴 적 기억에는 전기밥솥에 안친 찹쌀을 중간에 몇 번이나 뒤섞으셨고 무언가 무척 복잡했던 기억이 남아서, 난 아예 도전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니. 항암으로 입맛을 잃은 엄마에게 해드릴 수 있었다면 참 좋아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퀸 Ti 냄비로 손쉽게 약밥을 만들어 한 입 떠먹으니 옛날 엄마의 손 맛이 떠올라 그리움에 살짝 눈시울이 따뜻해진다.
지금 곁에 계시다면 약밥을 뚝딱 만들어 같이 먹고 싶다.
[ 약밥 ] (재료) 마른 찹쌀 계량컵으로 3컵, 밤 10알 또는 삶은 병아리콩, 호두, 잣, 대추, 은행 등 (소스) 간장 5T, 마스코바도 설탕 수북이 2/3T, 참기름 2T, 계핏가루 1st
1) 찹쌀과 병아리콩은 미리 불려둔다.
2) 퀸 Ti 냄비(소스팬)에 불린 찹쌀, 소스와 밤/병아리콩을 넣는다. 물은 밤이 살짝 잠길 정도만 넣는다
3) 뚜껑을 덮고 센 불에 놓고 끓으면 한번 뒤섞어서 약한 불에 약 20분 정도 익힌다. 마자막에 호두, 잣, 대추, 은행 등을 넣고 불을 끄고 뜸을 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