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뽀의 기쁨도 잠시, 돌연 사직서를 내고 대학원에 가다.
제 발로 다시 영화를 꿈꾸는 길로 들어섰다고 해서 대단한 일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일단 무사히 대학교 졸업을 하는 것에 매진했다. 우리 학교 경영학과 졸업을 위한 마지막 필수 과목은 한 학기 동안 팀 프로젝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정신이 없었다. 지난 학기에 고꾸라졌던 성적을 회복해야만 했고, 졸업한 뒤 시간을 끌고 싶지 않은 욕심도 있었기 때문에 취업 준비도 병행했었다. 아주 평범한 대학교 4학년 모습과 별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공과 학부 성적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업계에 종사하는 것을 희망하면서 학교 성적에 과도하게 연연해하는 나에 의문을 가지곤 했었다. 나의 학부 생활은 정말 일, 공부, 그리고 덕질 취미생활(..) 딱 이렇게 삼등분되어 있었고, 세 가지에 내 에너지들을 최대로 쏟아내며 지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일을 하지 않으니 한 가지가 줄어들어서 나머지 둘에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절대량들이 늘어났다는 정도? 어릴 때부터 나는 공부하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공부를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 나서서 더 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오늘은 이만큼 해야 돼'라고 하면 그냥 했다. 경영학과에 진학한 이유도 비슷한 결이다. 인문계 학생으로서 상식적으로 당연히 선택해야 하는 길이라 생각해서 그냥 갔다. 사실 경영학과에 오는 사람들 중에 대단한 뜻을 가진 경우는 드물 것이다. (어쩌면 다른 학과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입시의 아주 슬픈 속사정이다.) 나에게 경영학과는 일종의 보험이었다. 경영학과에서 학생을 제일 많이 뽑으니 재수할 확률을 줄일 수 있을 것이고, 경영학과니까 추후의 나의 도전들이 좌절되었을 때 방향을 어디로 틀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일 수 있게 해 줄 아주 매력적인 보험. 그 보험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경영학과 아주 유관한 분야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학업 성적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영화 업계에 한 번에 취업할 수 있게 되었고, 최우등 졸업을 안겨준 나의 좋은 성적은 정말 나의 뿌듯함만을 주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학부 졸업 이후 나는 바로 회사에 (아주 잠깐) 다녔다. 업무는 영화 홍보. 코로나19 사태가 회복되고 영화업계가 창고에 쌓여있던 영화를 미친 듯이 꺼내 보이던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입사하자마자 적응할 새도 없이, 수습 교육을 받을 새도 없이 다수의 영화 홍보 프로세스를 따라가는데 급급했다. 일이 바쁜 건 힘들지 않았다. 나는 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정도라도 바쁜 걸 즐기는 타입이다. 또한 조금이나마 영화업계에 활기가 돌아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했다. 회사가 정신이 없고 그래서 직원들이 예민해져 날 선 대화가 오고 가는 것,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고 추가 수당 따위는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밤낮없이 일하는 것.. 에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슬프게도 이 업계에선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었고 짧게나마 여러 곳에서 일하면서 충분히 겪으며 익히 알고 있던 현실이었다. 취업난 시대에서 그것도 내가 원하는 분야에 발을 바로 담글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그리고 이건 현재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회사에서 어떻게든 버티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사회 현실을 악용해서 '너 말고도 뽑을 사람은 많다'며 신입들을 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말이다.
그렇게 바쁜 홍보 일정들을 소화하던 도중 나는 돌연 사직서를 썼다.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코로나19 사태를 겪고 나서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도 한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까지의 모든 프로세스가 제자리걸음인 것에 화가 나서였다. 코로나19 사태가 잠잠해졌지만 사람들은 극장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동안 못 갔던 해외여행을 가거나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고, 놓친 영화는 OTT 채널로 쉽게 해결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외부활동이 줄어들면서 각종 OTT 채널들이 급부상하고, 온갖 자사 오리지널 작품을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었지만, 코로나19가 회복되자마자 사람들의 우선순위에서 'OTT 콘텐츠 시청'은 밀려났고 제작된 작품들은 길을 잃었다. 하지만 약 10년 전과 다름없이 여름휴가철이라고 모든 메이저 배급사가 이때다 싶어 텐트폴 영화를 동시다발적으로 내놓았고, 특별하지도 않은 홍보 활동을 의례적으로 하고 있었다. 나는 업계 관계자들이 이 현실을 정말 모르는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모든 상황이 웃겼다. '여름이라고, 연휴라고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없어진 지 오래 같은데, 예전에나 먹혔을 평범한 상업 영화들을 가지고 카피문구는 '올여름을 시원하게 날릴 액션' 뭐 이런 식으로 써야 했다. 극장을 찾지도 않는 분위기 속에서 영화 티켓값은 배가 되었는데 영화와 영화 홍보 방식은 정말 그대로였다. 개봉하지 않는 것보다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극장에 내거는 게 덜 손해라고들 하지만 모든 영화사, 배급사들이 그저 짬처리에 급급한 상태로 있는 현실이 영화 팬으로서 안타까웠다. 손과 발은 형식적인 홍보 업무를 좇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선 근본적인 물음들이 떠나지 않았다. 영화의 현재 위치는 어디인 걸까? 영화는 이대로 계단을 내려가는 수순인 걸까? 이 변화를 어떻게 잘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사직서를 내고 진학하고자 했던 대학원 교수님과 상담하기까지의 진행 과정은 정말 빨랐다.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기 위한 발판으로 대학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거의 학부 졸업하자마자 대학원에 가게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포기했다가 다시 힘겹게 돌아왔는데 일을 진득하게 해 보기도 전에 또 한 번 돌아가려는 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다. 주어진 일이라면 무던히 해내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 힘들고 바쁜 건 잘 참아내던 내가 정직원으로 들어간 회사 하나 오래 못 버티고 나오는 게 우습기도 했다. 업계가 돌아가는 현실에 현타가 왔으면 진작 오고도 남았을 텐데 이제 와서 '업계가 돌아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 하고 나오는 건 힘들어하고 자신도 확신도 없는 내 모습을 애써 감추기 위한 핑계가 아닐까 계속 되묻기도 했다.
초심을 다시 떠올려봤다. 나는 왜 영화를 사랑하는가, 왜 영화 일을 하고 싶어 하는가, 왜 영화로 꿈을 꾸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가. 한때는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거라는 아주 순수한 믿음을 가지기도 했었다. 해가 지날수록 현실을 직시하며 그 믿음은 저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영화가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을 툭, 건드릴 수는 있다고 믿는다. 별 거 없이 잘 지내고 있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영화에 의해 건드려진 사람들이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생긴다면, 그냥 지나쳤던 것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면 당장의 세상은 바뀌지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움직이지 않더라도 방향을 다시 맞춰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내 믿음은 이상하게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과도기다. 극장의 대체재가 너무 많아 영화가 잠시 방황을 하고 있을 뿐 영화의 본질과 그 역할, 그리고 대중문화로서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제자리로 오게끔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경이 변화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영화가 잘 맞춰 걸어갈 수 있게 하고 싶었다. 현실에 안주하며 혹은 현실에 치이느라 정신없이 형식적인 것만으로는 현재 갈 길을 제대로 못 잡고 있는 영화를 살릴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더 큰 그림을,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영화를 이끌어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화를 선보이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영화 산업 자체를 연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진짜 돌아갈 곳이 없다고 다짐하고, 빠르게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한 번에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학부 성적 잘 유지해놨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