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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 Aug 20. 2024

너 영화 만들어야 돼...

제가요?

영화 <파벨만스> 스틸

나는 신기하게도(?) 영화를 좋아하면서 한 번도 나만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많은 영화감독들이 좋은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와 나도 저렇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영화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 것 같아 보이던데.. 나는 '나도 만들어볼까?'와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대학원을 준비할 때도 고민이 많았다. 영화/영상 관련한 학과들은 제작이 커리큘럼의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만들어서 선보이는 것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좋은 영화들을 발굴해서 세상에 꺼내 보이는 역할을 하고 싶어 해 왔다. 좋은 작업들이 더 빛날 수 있게 서포트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편이었다. 때때로 이건 나의 최애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빛을 보는 그 과정을 함께하며 뿌듯해하는 덕질 기질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한다.. 아무튼 영화를 만드는 건 꿈꿔본 적도, 욕심도 없었으며 나는 원래부터 예술 행위는 하늘에서 '재능 신내림'을 받은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천상계의 영역이라고 믿어왔다.


때문에 당연히도 나는 제작 쪽을 전공하는 학과를 택하지 않았다. 영상학과 중에서도 행정과 산업 연구를 주로 하는 석사 과정을 밟기로 결심했다. 영화 연출이나 이론 수업을 전혀 들어보지 않았기에 관련 지식이나 현장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비전공자로서 부담도 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배우려고, 공부하려고 입학한 것이니 평소에 흥미가 적었던 영화 이외의 영상 분야 수업이라도 편견이나 거부감 없이 듣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었다. 학부 시절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늘 입학했을 때와 새 학기를 준비할 때에는 이상한 지적 욕망과 허영심이 넘쳐난다. 강의계획서를 훑으면서 어려워 보이는 내용들도 공부하고 싶어지고 흥미로워지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하물며 내 발로 들어간 대학원인데 오죽했겠는가. 그래서 입학하고 첫 학기는 영화와는 조금 관련 없는 수업들을 신청했었다. 사람들이 점점 영화를 떠나 다른 영상들을 찾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영화만 고집하는 보수적인 마음은 좀 접어두고 영상 트렌드를 파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래야 영화가 현재 맞닥뜨린 문제점들을 찾아내 해결책을 고안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열정이 불타올랐다. 그렇게 입학하고 첫 주는 열심히 학업 의지를 다졌었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그리고 사람들도 쉽게 변하지 않는 법. 영화를 찍고 싶다는 욕심 없이 그저 좋은 영화를 보는 걸 즐기는 단순한 나부터도 영화가 이러한 침체기에 접어들고 사람들이 점점 영화를 찾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가는 것에 속상해하는 마당에,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어오고 만드는 것을 꿈꿨던 사람들은 오죽할까. 이 상황에서 학부시절 영화를 전공했거나 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것에 계속해서 갈증을 느꼈던 것일까,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기꺼이 영화를 만드는 것을 교수님께 제안했었다.(고 한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열망을 품어온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걸 대학원 와서 새삼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원래 수업 계획에는 없었던 영화 촬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나는 그다음 주에 등교하자마자 '영화 촬영 한 번 해보시겠어요?'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덕질 좀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짤.

대학원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에 냅다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식을 당연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주저하는 나를 바라보던 여러 눈동자들이 주는 압박감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전공자 출신도 아닌 데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으며 내 인생에서 한 번쯤 영화를 찍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계획조차도 없었지만, 마치 싫다고 하면 '왜 영화 좋다고 온 사람이 영화를 찍고 싶어 하지 않는 거지?'와 같은 의문을 품은 질문이 쏟아질까 두려웠다. 결국 나는 마지못해 '아아..^^'하면서 반강제적이지만 긍정의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애써 웃는 것이 느껴졌는지 교수님께선 당연히 처음은 어려운 법이다, 안 해봤으니까 간단하게 진행해도 된다, 서로 도우면서 찍으면 된다, 같이 하면 된다 등의 여러 문장으로 나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셨지만 솔직히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예 영화 찍는 과정에 무지했다면 오히려 맨땅에 헤딩이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매하게 영화계에 발을 걸치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프로세스를 아는 사람으로선 시작부터 한숨이 멈추지 않았다. 당장 영화로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것부터 문제였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내 개인 사정일 뿐, 나는 바로 일주일 안에 로그라인과 트리트먼트*를 작성해서 제출해야만 했다.

*로그라인: 영화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

*트리트먼트: (단편 기준) 장면 별 대략적인 내용들이 서술식으로 작성된 시나리오


약 4개월 동안 진행되는 한 학기는 짧은 듯하면서도 길다. 갑작스럽게 한 학기 동안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한 건 계속되었지만, 시나리오를 완성해 나가는 동안에는 영화를 찍는 행위가 멀게 느껴져서인지 실질적인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시나리오 소재를 찾는 것은 어려웠지만, 소재가 결정되고 나서부턴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으며 생각보다 술술 써졌다. 시나리오 쓰는 것은 처음이었을지언정 평소에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멀리하지 않았어서 그런 건지 글 쓰는 행위 자체에서는 의외로 막힘이 없었다. 한 학기 동안 단편 영화를 찍어야 하는 아주 큰 과제가 갑작스럽게 주어졌지만 당장 찍는 게 아니라 생각해서 본격적인 프리 프로덕션 단계가 시작되기 전까진 일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었다. 시나리오 쓰면서도 딱히 미래를 생각 안 했던 것 같다. 그저 한 주 동안 교수님이 이만큼 써오라 하면 딱 그만큼만 썼고, 피드백을 받으면 피드백을 받은 만큼만 하고 촬영 관련한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애써 회피하고 싶었던 건가..) 지난 연재 글에서도 썼듯, 내 인생은 정말 학업과 덕질 취미 생활(...)로 구분된 사람인지라 딱 주어진 만큼의 과제가 끝나고 나면 열심히 취미 생활을 하느라 바빴다. 특히나 4월은 (나의 첫 번째 글에서 언급된 선수의) 가장 중요한 경기가 계속되었던 지라 이래저래 바빠서 더더욱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네가 선수냐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의 온갖 문제들은 이래서 발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폭풍 전이 가장 고요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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