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았으면 했던 촬영날이 결국 밝아왔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촬영 전날 나는 밤을 꼴딱 지새웠다. PD와 조연출 없이 돌아가던 촬영이었기에 두 스태프가 나눠서 할 법한 일들을 내가 다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24시간이 모자랐었다. 촬영은 공식적인 종강 2주 전에 진행되었던지라, 와중에 다른 수업들은 기말 소논문과 발표 과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촬영 이틀 전엔 외부 피칭 행사가 있었고, 촬영 전날에는 한창 촬영 관련한 준비들을 하다가도 중간에 등교해서 수업도 들었어야 했다.
어떤 업무가 나에게 주어지면 나는 적어도 나 스스로가 정해놓은 어떠한 기준선 이상은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최대한 몰입하는 편이다. 그래서 다른 과목들의 과제들을 하면서 기술적인 부분 이외에 촬영 관련한 모든 것을 책임지는 건 심리적으로 너무 큰 압박감이다 못해 일종의 공포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특히나 영화 촬영은 살면서 내가 한 번도 그려 본 적 없었던 프로젝트였을 뿐만 아니라 원하지 않았던 일이다 보니 내가 훨씬 자신 있고 또 욕심이 있던 학기말 소논문 쓰는 다른 수업들에 생각보다 신경 쓰지 못하고 촬영에 더 매진해야 하는 게 내심 속상했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영화를 찍어야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머리를 쥐어뜯다가 정말 촬영 전날까지 왔고,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으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마지막까지도 날이 밝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면서 촬영에 필요한 준비물들과 식량을 준비하고 촬영 계획표와 콘티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나니 슬슬 까만 하늘이 걷히기 시작했다. 여름의 초입이었어서 그런지 슬프게도 동이 빠르게 트고 말았다. 본격적인 촬영 전 장비를 대여해야 했기 때문에 촬영감독님과 나는 콜타임보다 3시간 정도 일찍 움직였다. 촬영을 최대한 빠르게 해치우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었던 나는 교내 이외의 장면들은 다 집 근처와 실제 내 방으로 정해두었었지만 야속하게도 장비 대여하는 곳은 우리 집과 정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었던지라 고카페인 음료를 들이켠 뒤 부지런하게 움직였어야 했다.
같이 수업을 듣던 선배님의 감사한 도움으로 기술적인 부분들을 해결해 주실 촬영감독님과 음향감독님은 섭외가 되었지만, 이외의 인력은 정말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PD도 나였고, 조연출도 나였고, 감독도 나였고, 각본도 나였고....... 짧은 영상일지라도 촬영 한 번 할 때 엄청난 인원이 투입된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촬영 현장을 경험해 보거나, 관련 공부나 일을 해본 사람들을 비전공자인 내 주변에서 구하는 건 정말 사막에서 바늘 찾는 수준이었다. 학부 시절 일을 하면서 알았던 사람들이나 내 친구들 중 이 분야와 비슷한 전공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학기 중에, 그것도 평일에, 종강 2주 전 촬영 현장에 불러오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구인을 하기엔 비용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정말 이 일과 관련 없는 친구들에게 무릎이 닳도록 빌었었다. 그리고 정말 고맙게도 다들 흔쾌히 도와주러 이 보잘것없는 촬영장에 와주었다.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은 연차를 쓰면서까지. 외향적인 성향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인간관계이지만 다들 불쌍한(?) 나를 위해 나서주는 걸 보며 그래도 우정은 잘 다져왔구나 싶어 감동적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촬영 직전 상황을 요약하자면..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스태프분들을 제외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의 준비가 촬영 직전까지 준비되지 않았기에 배우분들께 죄송하지만 (아직까지도 참 부끄럽고 미안하다..) 무슨 디렉션을 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거진 뭐 '알아서 연기해 주세요' 수준으로 촬영을 정말 어리숙하게 진행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베테랑 촬영팀과 음향팀 덕분에, 그분들의 조언을 토대로, 그리고 컷 이후에 대충 눈치를 보면서 오케이를 할지 말지 결정했었다. 영화 자체가 학교 배경이 메인인지라 학교 장면 이외의 장면들을 찍는 촬영 첫날은 생각보다 스무스하게 지나갔다. 내 방과 집 근처에서 찍어서 그런가 묘하게 안정감이 들기도 했었고 (안정감이 든 건지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정이 빡빡하지도 않아서 생각보다 빨리 끝나기도 했다. 다만 아는 게 없으니 뭐 제대로 찍혔는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레디 액션을 외치는 것마저 어색해서 웅얼거리며 외쳤었을 지경이었으니.
문제는 학교에서 촬영을 하는 둘째 날이었다. 총 7씬을 찍어야 하는데, 그렇게 힘겹게 구한 학교 측에서 촬영 가능 시간을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라고 고지를 내렸기 때문이다. 한 씬을 찍는데 준비 시간까지 포함하면 최소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을 잡아야 하는데, 식사 시간이나 기타 돌발 상황까지 생각하면 7씬을 8시간 내에 찍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영화적 서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장면들은 대사도 많고 동선도 나름 연습해야 했으며, 보조출연 학생들과 단역들까지 나오는 장면도 있었다. 첫날 촬영은 그럭저럭 무사히 넘겼지만, 남아있는 촬영만 생각하면 속이 턱 막혔다. (그런데 첫날 워낙 잠도 못 자고 긴장했었어서 그런지 기절잠을 자긴 했다.)
학교가 오전 9시에 딱 맞춰서 개방된다고 전달받았기 때문에 콜타임은 여유로웠지만 학교 위치가 서울에서 벗어나 있다 보니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건 첫날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9시 땡! 하면 바로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더 부지런히 움직였었다. 그렇게 둘째 날 촬영은 시작되었지만, 우려했던 대로 첫날보다 동선도 많아지고 대사도 많아지다 보니 버리는 촬영본들이 많았고 빡빡한 촬영 스케줄은 계속해서 늘어지게 되었다. 결국 찍어야 할 분량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점심시간이 왔고, 나의 멘탈은 가출해 버렸다. 보조 출연을 할 학생들과 단역들에게 딜레이 된 상황들을 설명할 겨를은 당연히 없었고, 그들이 참여할 장면을 찍을 수나 있을까 싶은 걱정이 도사리고 있는 와중 시간은 계속 흘렀고 미안하지만 계속 기다림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출한 멘탈은 5시에 촬영이 끝나고도 돌아오지 않아서 이 이후의 상황들은 기억이 흐릿하다. 나는 계속해서 정신이 없었고, 도망치고 싶었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는 것 정도만 대충 머릿속에 남아있다. 5시에 교문이 닫힌다고 4시 20분 즈음부터 학교 측에서 계속 안내를 해주셔서 5시 10분 전? 에 어찌어찌 촬영을 끝내고 컴퓨터에 데이터를 백업하면서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는 것도 기억이 나긴 한다. 그리고 5시에 맞춰서 빠르게 해산하느라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촬영이 끝났다. 이 모든 여정이 시작되는 것도 거짓말 같았는데 현장 마무리가 이렇게 되니 나 여태까지 뭐 한 건가, 혹시 이거 꿈인가 싶었다. 그렇게 프리 프로덕션 기간 동안 난리 부르스 쳤는데 시간 맞춰서 우당탕탕 촬영 학교를 벗어나고 나니 내 영화 촬영이 끝났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