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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 1. 삶은 무덤 주위에서의 향연이다

당신의 깨달음은 어느 역에 있나요?

by 고하


경험 뒤에는 늘 깨달음이 이어지기 마련이며,

대부분 그 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인생이든 기술이든 그렇다.

특히, 깨달음의 난이도가 높을수록

포도송이처럼 크고 작은 깨달음이 계속되며

그 당도(糖度) 또한 갈수록 달콤하다.

"어때요? 당신은 지금 달콤한가요?"


그리고, 깨달음은 한 방향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어떤 깨달음은 뿌듯함과 함께 미래에 대한 행복감을 갖게 되고, 어떤 깨달음은 깊은 후회와 함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어때요? 당신은 어떤 깨달음이 더 많았나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떤 깨달음이든 담쟁이처럼 다시 양갈래로 뻗어 나간다. 행복한 깨달음은 거기서 안주하던지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 나서던지 할 것이고, 회한의 깨달음은 주저앉든지 다시 도전하는 계기가 되던지 할 것이다.

"어때요? 당신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요?"


이렇게 깨닫고 깨닫고 수 백 번의 깨달음 속에 '시간'이라는 내공이 양파처럼 찰지게 입혀지게 되고, 그 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깨달음에 맛을 입힐 뿐만 아니라 질과 양을 모두 강화시킨다.

"어때요? 우리는 깨달으면서 살아갈까요?"



전쟁 같은 깨달음과 토핑 같은 시간이 만나 마침내 얻는 것은 '내적 여유'이다.

'여유'만 도달해도 짜릿할 텐데,

여기서 좀 더 깨달음을 내달려 끝까지 도달하면 진정한 '자유(진리)'에 이른다.

굳이 聖人의 경지에 도달한 유명한 사람들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자유(진리)에 도달하거나 눈앞에서 목격하는 정도의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인생이든 어떤 종류의 기술이든, 부럽다기보다 참 궁금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때요? 당신은 어디까지 깨닫고 싶으세요?"


안타깝게도 '여유'조차 깨달음 없이

'회한'으로 세상과 이별하는 사람도 많다는 직감이 든다. 동병상련인지 글을 쓰면서도 눈시울이 붉혀지지만 이조차 '깨달음'이 아닐까! 나는 깨닫기만 하다가 떠날 것인가?

'여유'라도(?) 얻을 것인가?

한 가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은 삶은 다소 복잡하지만 깨닫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는 것이다.

"어때요? 후회가 더 많을 것도 같다는 이 느낌적인 느낌이 맞는 걸까요?



어떤 깨달음이었든 -과학기술로도- 아직까지 우리가 득하지 못하는 '자유(진리)'는 생물학적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서양 철학에서 죽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아의 상실, 동양철학에서는 윤회적인 새로운 세계로의 입적, 그리고 종교에서는 영적세계의 시작으로 보는 것 같다.

깨달음의 한계가 죽음이라면 생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 깨달음이 멈추면 그게 마지막 깨달음이겠다.



'삶은 무덤 주위에서의 향연이다'

Kind Editor 古夏



P.S

저는 굴레처럼 살아가는,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조금은 측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살다가

우연히 만나는 우리 사람들!

성공과 안위, 욕망에 욕심내던 시간을 뒤로하고

깨달음 하나를 픽(pick)하게 되었지요.

(아직도 전쟁이 한 창이긴 하지만)


'서로 따뜻하게 안아주며 사는 것'


'삶은 무덤 주위에서의 향연이다'라는

저의 생각이 염세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어요.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실제에서 저는,

죽음이라는 '불변의 무덤'보다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향연'을 택한 것입니다.


만일 내일이 무덤이라 해도 저는 오늘 더 큰 '향연'을 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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