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깨달음은 뿌듯함과 함께 미래에 대한 행복감을 갖게 되고, 어떤 깨달음은 깊은 후회와 함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어때요? 당신은 어떤 깨달음이 더 많았나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떤 깨달음이든 담쟁이처럼 다시 양갈래로 뻗어 나간다. 행복한 깨달음은 거기서 안주하던지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 나서던지 할 것이고, 회한의 깨달음은 주저앉든지 다시 도전하는 계기가 되던지 할 것이다.
"어때요? 당신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요?"
이렇게 깨닫고 깨닫고 수 백 번의 깨달음 속에 '시간'이라는 내공이 양파처럼 찰지게 입혀지게되고, 그 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깨달음에 맛을 입힐 뿐만 아니라 그 질과 양을 모두 강화시킨다.
"어때요? 우리는 왜 깨달으면서 살아갈까요?"
전쟁 같은 깨달음과 토핑 같은 시간이 만나 마침내 얻는 것은 '내적여유'이다.
'여유'만 도달해도 짜릿할 텐데,
여기서 좀 더 깨달음을 내달려 끝까지 도달하면 진정한 '자유(진리)'에 이른다.
굳이 聖人의 경지에 도달한 유명한 사람들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자유(진리)에 도달하거나 눈앞에서 목격하는 정도의 사람도 있는것 같다.
그것이 인생이든 어떤 종류의 기술이든, 부럽다기보다 참 궁금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때요? 당신은 어디까지 깨닫고 싶으세요?"
안타깝게도 '여유'조차 깨달음 없이
'회한'으로 세상과 이별하는 사람도 많다는 직감이 든다. 동병상련인지 글을 쓰면서도 눈시울이 붉혀지지만 이조차 '깨달음'이 아닐까! 나는 깨닫기만 하다가 떠날 것인가?
'여유'라도(?) 얻을 것인가?
한 가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은 삶은 다소 복잡하지만 깨닫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는 것이다.
"어때요? 후회가 더 많을 것도 같다는 이 느낌적인 느낌이 맞는 걸까요?
어떤 깨달음이었든 -과학기술로도- 아직까지 우리가 득하지 못하는 '자유(진리)'는 생물학적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서양 철학에서 죽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아의 상실, 동양철학에서는 윤회적인 새로운 세계로의 입적, 그리고 종교에서는 영적세계의 시작으로 보는 것 같다.
깨달음의 한계가 죽음이라면 생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 깨달음이 멈추면 그게 마지막 깨달음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