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얼마 뒤 입사한 직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20년 가까이 근무를 할 수 있었다. 나를 인정해 주고 그만큼의 대가도 받을 수 있는 곳이라, 이곳에서만큼은 안정적으로 직장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혼 전에는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었기에, 나에게는 모아 놓은 돈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 또한 시댁이 경제적으로 너무나도 힘들 때에 결혼을 하게 된 터라, 우리 부부는 신혼집을 구할 돈조차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둘이서 맞벌이를 하며 열심히 일을 해도 적은 월급으로 돈을 모으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빨리 제대로 된 집이라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첫 아이까지 늦게 가져가며, 남편과 허리띠를 졸라매고 적금도 들어가며 한 푼 두 푼 모은 끝에 겨우 작은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큰 아이가 태어나고 몇 년 뒤 작은 아이도 태어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건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한참 커야 하는 아이들을 둘이나 먹이고 입히려다 보니, 무작정 아끼는 것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두 사람의 월급으로 4명이 살아가는 건 항상 빠듯했다. 첫째와 둘째를 낳는 동안 나는 출산휴가 3개월만 을 쓰고 바로 복직했다. 육아휴직도 쓰고 싶었지만, 육아휴직 수당만으로는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정상 근무를 다하고 받은 제대로 된 월급이지만, 돈이 남기는커녕 적자를 면하기도 어려운 날들이 연속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는 전셋집에서 사는 것이 항상 노심초사였다. 남자아이만 2명이다 보니 집을 깨끗하게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벽지에 낙서를 하거나, 뛰어다니며 마루 바닥이라도 훼손시키는 날에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사 나갈 때 모두 다 원상 복구하고 가라는 집주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매번 이사를 다니는 것도 쉽지 않으니, 이사 걱정 없이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 집이 필요했다.
하지만 집을 사기에는 가진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우리에겐 든든한 은행이 있지 않은가.
"일단 집을 사자. 은행 대출이야 살면서 천천히 갚으면 되지 뭐."
이렇게 집 사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문제는 대출을 갚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그리 어렵다는 거였다.
둘이서 맞벌이를 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갚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언젠가'가 좀처럼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달 빠져나가는 대출 이자도 꽤 큰 편이라서 부담스러워서, 원금 상환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물가는 내 월급보다 훨씬 빨리 오르는데, 들어오는 수입은 한정적이었다. 그에 비해 매달 생각지도 못한 지출은 끝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해왔지만, 두 사람이 받는 월급만으로는 매번 마이너스였다. 돈은 마치 한 번에 밀려왔다가, 돌만 남기고 싹 사라지는 푸른 바다의 파도 같았다. 내 곁에 붙들어 두려고 해도, 썰물처럼 나를 떠나가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