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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찬스 Oct 27. 2024

[소설 15화] 비워 버린 잡동사니


선희와 바다를 보고 온 찬희는 그동안 손 놓고 있기만 했던 진우의 짐들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우의 짐들은 현관 팬트리 안에 제일 많이 있을 터였다. 찬희는 거실을 뚜벅뚜벅 지나쳐 현관에 도착해서는 잠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진우의 짐들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팬트리를 열어보려고 하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멍하니 서서 잠시 뜸을 들인 찬희는 용기를 내어 팬트리의 문을 살며시 당겨 보았다.

팬트리 내부의 벽에는 진우가 자신과 함께 치던 배드민턴 라켓이 걸려 있었다. 팬트리 한쪽 귀퉁이에는 서후가 크면 함께 할 거라며 사놓은 축구공도 자리 잡고 있었다. 팬트리 안에서 제일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던 건 단연, 진우가 만들 거라고 사놓았던 비행기 프라모델 박스들이었다. 제대로 된 완성품이 되지도 못한 채 쌓여만 있는 진우의 비행기 박스들을 본 순간 찬희는 제대로 된 삶을 마치지 못했던 진우가, 그리고 진우를 처음 만났던 그때가 떠올랐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좋아 막상 국어국문과에 입학은 했지만, 전공을 살려서 취업을 하는 것이 찬희에게는 쉽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얼른 취업해서 선희 언니에게 도움받은 돈도 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언니는 입학 기념 선물로 그냥 준 거라고 했지만, 매번 도움을 받은 언니에게 마냥 손을 내밀 수 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진로에 대해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같은 과 친구들과도 어디에 어떻게 취업할 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얼마 전 부모님이 해외여행 가는 길에 면세점에서  립스틱을 사다 주시더라."

"지금 바른 그거야? 오! 색깔 예쁘네."

"그치? 근데 그 면세점 직원이 일본 손님한테 일본어로 물건을 팔더래. 우리 엄마가 그걸 되게 신기해하시더라."

"맞아! 면세점에 들어가려면 외국어 하나쯤은 하면 좋다고 하더라고."


찬희는 선희 언니의 가장 친한 초등학교 친구인 은영언니가 스카이 면세점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집에 오랜만에 놀러 왔던 은영 언니도 찬희에게 얼핏 얘기해 준 적이 있었다. 면세점에는 한국 관광을 온 외국인들이 쇼핑하러 많이 온다고 말이다. 특히 일본인 고객이 많아서 일본어를 잘하면 좋다고 했다.

그 얘기가 어렴풋이 떠오른 찬희는 일본어 자격증을 따 놓으면 면세점에라도 취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일본어를 배워놔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이 되자 일본어 학원 새벽 반에 등록했고, 학교 공부와 아르바이트로 피곤했지만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다.

수업을 들은 지 4주 차 되던 월요일 아침, 찬희는 전날 늦은 시간까지 한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인해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학원에 도착했다. 매일 보던 얼굴들과 간단하게 눈인사를 마치고는 항상 앉던 제일 뒷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그날 아침은 새로 온 수강생에게 이미 그 자리를 뺏겨 버린 상태였다.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에 찬희는 마침 비어 있던 제일 앞 줄 자리에 서둘러 앉았다. 옆 자리에서는 항상 눈웃음으로 자신을 맞이해 준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늘 뒷자리에 앉느라 4주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얼굴을 본 적 없던 그를 보며 찬희도 고개를 끄덕여 가볍게 목례했다.

수업 중에 일본어 강사가 프린트물을 나눠 주었다.

프린트물을 옆 사람에게 넘기는 순간, 찬희는 날카로운 A4 프린트물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뭔가 따끔하다 싶더니 이내 피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걸 본 옆자리 남학생이 급히 가방에서 주섬주섬 반창고를 꺼냈다.

찬희에게 반창고를 건네며 남학생이 수줍게 말했다.

"저도 잘 베이는 편이라서요..."

반창고를 주며 남학생은 한껏 눈웃음을 지어 보였고, 찬희 또한 따가운 손을 꽉 누르고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반창고를 받았다.

고마운 마음에 찬희는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자판기로 달려가 커피를 뽑아 들고는 급히 나가려던 남학생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아까 반창고 주셔서 감사했어요."

커피를 받아 들며 남학생이 말했다.

"안 그래도 또 학교 가서 전공 강의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잠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잘 마실게요."

그러면서 갓 나온 뜨거운 커피를 그 자리에서 원샷 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남학생은 학원 맞은편에 있는 학교 캠퍼스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뭐 저리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


찬희는 고마움의 표시로 커피를 마시면서 사심 없이 인사치레의 대화 정도만 하려고 했던 건데, 괜히 자신에게 별 관심도 없는 사람한테 커피 대접을 한 건가 싶어서 민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 강의실에서 급히 나오느라 뒤죽박죽이 된 가방 안을 천천히 정리한 뒤 남학생보다 한참 뒤에 학원을 나섰다.

학교로 뛰어가던 중, 진우는 입가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가며 읊조렸다.

"나를 보며 웃었다."


지난겨울 방학부터 다닌 일본어 학원에 언제부터인가 쌍꺼풀 진 큰 눈의 단발머리 여학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고 아담한 체구의 그녀에게 진우는 처음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귀엽고 인상 좋아 보이는 모습이 시간이 지날수록 큰 매력으로 다가와서, 진우의 마음속에서는 잊히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과도 닮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었지만, 항상 제일 뒷자리에만 앉아 수업을 받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는 없었다. 제일 앞자리를 거의 지정석으로 몇 달째 앉아온 자신이 갑자기 제일 뒷자리로 바꿔 앉아 수업을 듣는다는 것도 너무나 표 나고 웃기는 일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까지는 하루도 안 빠지고 열심히 하는 걸 보니 그녀가 한 달만 하고 때려치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시간을 두고 좀 더 지켜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와 얘기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진우에게 오늘 바로 그 기회가 온 것이었다.

어제 아버지 가게 일을 도와드리다 마침 손가락을 베었고, 아버지가 가게에 챙겨 놓으신 반창고 여분을 가방 안에 넣어 왔었다.

그런데 그 반창고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게다가 나한테 커피까지 줬어.'

여학생에게 설레어하는 마음이 들킬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우는 앞만 보고 마구 달렸다.
진우는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오늘 학교 전공 수업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하루를 보낸 뒤, 진우는 이튿 날도 아침 일찍 일본어 학원에 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단발머리 여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그녀가 보이지 않자 진우는 속이 타들어 갔다.

자신의 마음을 혹시라도 눈치챈 그녀가 부담스러워서 학원을 그만뒀나 하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이 멍충이! 이 멍충이!'라고 몇 번을 꾸짖어 보기도 했다.

연락처도 몰라 안부를 물을 길마저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하나 며칠 동안 고민하던 차에, 1주일이 지난 월요일 아침 그 여학생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음에 뛸 듯이 기뻤던 진우는 지난주 학교 전공 수업을 들을 때처럼, 오늘도 일본어 강사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시간 50분 내도록 어떻게 그녀에게 말을 꺼낼까만 고민하던 진우는 메모지를 꺼내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리고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여학생에게 달려가 자신의 전화번호가 적힌 그 메모지를 내밀며 말했다.

"지난번에 커피 잘 마셨어요. 저도 커피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되실 때 연락 한 번 주세요."

"저 오늘은 오후 수업만 있는데, 지금 가실래요?"

남학생의 호의가 싫지 않았던 찬희는 거절하지 않고, 진우와 함께 학원 옆에 있는 저가 커피 프랜차이즈 카페를 향해 걸어갔다.


밖은 비가 내릴 듯 말듯한 꿉꿉하고 습한 날씨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며 진우가 말했다.

"저... 이런 습한 날 먹는 햄이 뮌지 알아요?"


"네? 뭔데요?"

"습햄"

찬희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찬희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소에 긴장이 풀린 진우는 또 아재개그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럼, 그늘에 있으면 행복한 이유는 뭔지 알아요?"

"어... 왜요?"

"해 피해서..."

"아! 그만해요."

찬희가 입 속에서 삐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진우에게 그만하라고는 말했지만, 단어들이 가진 섬세하고 미묘한 차이에 대해 항상 놀라곤 하는 찬희는,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진우의 아재 개그가 싫지 않고 우습기만 했다. 찬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애쓰는 진우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정말 해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듯하면서도 유쾌해 보이는 진우의 모습에 찬희는 마음이 갔다. 대화를 할수록 느껴지는 그의 긍정적인 생각도 마음에 들었다.

힘들 때도 지칠 때도 그냥 한 번 웃기만 하면 괴로운 그 감정들이 다 날아간다는 그는, 자신의 좌우명이 '그냥 웃자'라며 말하면서 또 웃었다. 그런 그가 찬희에게 물었다.


"혹시 지난주에는 학원에 왜 안 나오셨어요?"

"아, 엄마가 일 가다가 미끄러지셔서 다리가 골절되셨어요. 그래서 병원에서 엄마 간병하느라..."

"아이고,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네, 수술은 하셔서 지금 좀 지켜보고 있어요."

"큰일 날 뻔하셨네요. 많이 아프셨을 텐데 괜찮아지셔야 할 텐데요."

그렇게 말한 진우는 마음 같아서는 병문안이라도 가고 싶다고 했고,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엄마까지도 저렇게 챙기나 하는 생각에 찬희는 진우가 왠지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진우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엄마가 중 1 때 병으로 돌아가셔서 아픈 엄마들 얘기 들으면 항상 마음이 쓰여서요."


어린 나이에 엄마와 떨어졌을 생각을 하니 찬희는 진우가 갑자기 측은하게도 보였지만, 그래도 구김살 없이 작은 것 하나에도 마음을 써주는 가 또다시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고된 아르바이트와 학과 공부, 자격증 취득까지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지쳐 있는 찬희에게, 진우는 어두운 밤길을 지켜 주는 빛나는 가로등과 같은 사람이 되어 주었다. 어두운 밤길을 걷던 찬희는 그 가로등에게 의지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진우와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진우의 짐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던 찬희는 자신도 모르게 노래 가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대학 2학년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잡동사니'라는 노래 가사였다.


내 방 안에 쌓여 있는 저 잡동사니들
이제 모두 깨끗하게 버리고 싶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너의 모든 생각들
내 머릿속의 잡동사니 모두 비우고 싶어



버리고 비우면 정리할 수 있을까
널 몰랐던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머릿속에서 날 어지럽히는 너


내 방 안에 쌓여있는 저 잡동사니들
이제 모두 깨끗하게 버리고 싶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너의 모든 생각들
내 머릿속의 잡동사니 이젠 비우고 싶어


가사를 쓸 당시에는 방 정리를 하다가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는 잡동사니를 보고는, 너무 치우기 싫은 마음에 잠시 쉬려고 앉았다가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적어 놓은 거였다.

이미 10년도 전에 쓴 가사였는데, 잊고 있었던 그 가사가 이제서야 생각이 난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한 내용의 노랫말이었다.

노랫말에 나름대로 음까지 붙어놨던 라, 찬희는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진우의 남겨진 짐들을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팬트리 안을 깨끗하게 비워 버렸다.

깨끗해진 팬트리 안을 보니 무거웠던 자신의 마음마저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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