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은 친정 엄마와 친언니인 선희가 서후를 번갈아 가며 돌보아 주었다.
선희는 찬희와는 열 살 터울의 자매였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고 머리 좋기로 소문난 선희였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과 어린 동생 뒷바라지 때문에 대학은 애초에 생각을 접었다.
선희는 여상에 들어가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고 은행에도 취직하게 되었다. 일이 많아 고되고 힘들었지만 큰 내색 없이 열심히 근무한 결과,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혼인할 나이가 한참이 지났는데도 결혼 얘기는커녕, 남자 얘기 한 번 안 꺼내길래, 가족들은 일이 좋아 결혼 같은 건 관심 없나 지레짐작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선희는 4살 연하의 남자를 엄마 앞에 데리고 왔다.
"돈이 좀 없긴 한데 내가 잘 버니까 먹여 살리면 돼."
멋쩍게 웃으며 선희는 엄마에게 말했다.
얼굴은 미끈하게 생겼지만 변변한 직업도 없는 남자가 엄마는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말리고 말려봤지만 딱 부러지는 성격의 큰 딸을 엄마는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니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일사천리로 스몰 웨딩까지 진행한 선희는 살고 있던 본인 소유의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처음 한 두 달은 둘이서 별 탈 없이 잘 사나 보다 싶어 엄마는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3개월 만에 선희는 남자와는 깨끗이 정리했다고 엄마에게 선언했다.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싶어 엄마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딸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첫 상여금을 받은 선희는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그 돈 그대로를 친정 엄마에게 입금해 드렸다. 결혼했으니 이제 더 큰 용돈을 엄마한테 드리기는 쉽지 않을 테니, 몸도 불편한데 결혼 준비한다고 신경 써 준 엄마에게 고마움의 선물로 드린 것이었다. 입금 내역과 엄마에게 보낸 출금 내역이 그대로 나와 있는 휴대폰 앱을 켜놓은 채, 선희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식탁에 놓인 휴대폰 은행 앱을 연하 남편이 보게 되었고, 이게 뭐냐고 선희에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뭐긴 뭐야? 엄마 용돈 드린 거지"
"결혼하면 번 돈은 부부가 같이 관리해야지! 왜 내 상의도 없이 이렇게 돈을 함부로 쓰고 다니는 거야?"
"돈을 함부로 쓰고 다니다니! 그냥 엄마한테 용돈 드린 거라고 했잖아! 뭐.. 말 안 하고 보낸 건 미안해."
선희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자 연하 남편은 이 때다 싶어 더 길길이 날뛰었다.
"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까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이 돈 그대로 갖고 와. 그리고 장모님 모시고 와서 당신이랑 같이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어. 잘못했다고"
남편이 내지르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선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남편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 나쁜 자식아! 돈 없고 불쌍해서 내가 너 데리고 살려고 했더니 너 정말 글러먹은 애였구나! 우리 여기서 그만 끝내자!"
어차피 결혼 3개월 차라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기 때문에 선희는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희의 불같은 반격에 처음엔 분통을 터트렸던 남편도 선희의 변함없는 단호한 태도에 이건 뭔가 잘 못 됐다 싶었다.
"여보 아까는 내가 심했어. 그냥 이번 한 번만은 넘어가 줘."
그러면서 손까지 싹싹 비벼댔다. 하지만 선희는 남편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다 연하 남편은 "너 아니면 여자가 없냐"며 집 안에서 본인의 유일한 소유물인 겉옷과 속옷만 챙겨서 집을 나가버렸다.
이후에도 남편은 끈질기게 선희에게 연락했지만, 선희는 더 이상 대꾸해 주지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몸도 성치 않은 엄마한테 무릎 꿇고 빌라니..미친 새끼..'
생각할수록 분했지만 선희는 다시는 내 인생에서 결혼 같은 건 없다고 다짐했다.
세상만사 좋은 게 좋다는 성격의 찬희와는 달리, 선희는 이렇게 맺고 끊음이 확실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이 철두철미한 선희였지만, 어린 동생에 대한 사랑만큼은 그 누구보다 각별했다.
선희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찬희가 태어났다. 늦둥이를 낳고 몸조리도 제대로 못한 체 시간제 일을 하러 가야 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선희는 학교에 갔다 오면 항상 아기인 찬희를 업어 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에 성공해서 돈벌이도 좋았던 선희는, 자기 옷을 살 때면 동생 옷까지 꼭 함께 샀다. 선희의 눈에는 옷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어린 동생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동생이 대학 입학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는 대학 입학금을 마련하기가 힘들어졌지만 다행히 선희 찬스를 쓸 수 있었다. 선희는 모으고 있던 적금을 깨서 찬희 입학금에 보태 쓰라며 엄마에게 흰 봉투를 내밀었다.
선희는 못 다녀본 대학이었지만, 찬희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기만을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찬희에게 있어 선희는 모두 걸 챙겨주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 그런 선희를 찬희는 부러워도 하고 자랑스러워도 했다.
진우의 사진을 보며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한 동안 멍하니 앉아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 찬희의 마음을 또 어찌 읽었는지, 선희는 찬희에게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바다에 가고 싶어."
"그래 가자. 바다"
그 길로 선희는 찬희를 차에 태우고 바다로 향했다. 그곳은 찬희가 진우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던 곳이었다. 그걸 이미 알고 있었던 선희는 일부러 찬희를 그 바다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
진우와 처음 찾았던 그날처럼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고, 파도 소리는 고요했다. 평온하고 푸른 바다 저 멀리에서는 이따금씩 파도가 밀려왔고, 파도에서는 하얀 물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그익숙한 장면들을 보자 찬희의 머릿속에서는 하얀 물거품이 뿜어져 나오듯, 진우와의 추억이 하나둘씩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추억들은 지나간 날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 아니라, 이제 와서 돌이켜 본다 한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후회에 불과했다.
진우가 일본 파견 근무 가는 걸 말리지 못했던 일, 그래서 건강검진을 제때 받지 못 받았던 일, 진우가 자신과 결혼했던 일, 진우가 무역회사에 취직하는 걸 말리지 못했던 일... 진우에 대한 생각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모두 후회되는 일 밖에 기억이 나지 않었다.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더라면, 남은 사람의 마음에 이렇게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갈 사람일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만나지도 말았을 것을...
머릿속이 온통 후회로 가득 차자 가슴이 먹먹해진 찬희는 훌쩍훌쩍 울먹이기 시작했다.
울먹이던 울음은 이내 통곡으로 변했고,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은 더 이상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실컷 울어. 나야 내가 싫어서 그 인간과 인연을 끊었지만, 너는 그게 아니니까 내가 어찌 니 속을 알 수 있겠니. 마음 풀릴 때까지 그냥 실컷 울어."
선희는 찬희를 달래지도 않고 그냥 울라고만 했다. 그런 선희의 말을 듣고 더욱 서러워진 찬희는 한참을 어린아이처럼 꺼억꺼억 소리 내어 울기만 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과 눈물이 뒤엉킨 체 울고 있는 찬희를, 선희는 아무 말없이 지긋이 안아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