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져보고 싶었지만 항암 치료를 거듭하면서도 진우의 몸 상태는 어떤 진전도 없이 점점 악화되어만 갔다.
힘들어하는 진우를 바라볼 때면 찬희 또한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우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아픔을 대신해 줄 수 없음에 찬희는 때때로 죄의식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 한들 별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매일매일 바랄 뿐이었다.그러나 그렇게도 바라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해의 끝이 보일 무렵 진우는 중환자실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환자실로 옮겨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의사는 중환자실로 가족들을 다 모으라고 했다. 환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는 것이었다.
꼬부랑 노인이 될 때까지 평생을 함께 할 줄 알았던 남편과 마지막 인사라는 걸 이렇게 빨리 하게 될 줄 찬희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구나.'
대기실에서부터 이미 눈이 충혈되어 버린 가족들은 하나둘씩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진우를 향해 걸어갔다.
침대에 누워서 미동도 하지 않는 진우를 보고 한참 눈만 마주친 현우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밖으로 나가 버렸다.
시아버지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진우의 손을 꼭 잡고는, 저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애달픈 감정을 애써 꾹꾹 눌러가며 말했다.
"잘 가라... 진우야... 가거든... 엄... 마... 에게 안부 전해줘."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진우는 아버지의 말에 손가락 끝을 까딱거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아버지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찬희는 진우의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찬희는 시야를 가리며 쏟아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다시 눈만 껌뻑이는 진우의 귀에 대고 말했다.
"오빠 그동안 많이 아팠지? 내 남편으로, 우리 서후의 아빠로 살아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찬희는 더 이상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줬다. 그리고는 눈물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진우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오빠를 혼자 보내려니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만... 이제 좋은 곳 가서 아프지 마요. 사랑해요. 여... 보..."
찬희의 얼굴에 남아 있던 눈물 한 방울이 진우의 얼굴에 떨어지자 얼굴을 약간 움찔한 진우는 마지막 힘을 다해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입을 뻥긋했다.
"나도... 사랑해..."
이윽고 모니터에서 신호음이 길게 울렸고 심박동 숫자는 0을 가리켰다.
3일 동안의 장례식과 화장을 끝내고 시어머니의 납골당이 있는 곳에 남편의 유골을 안치했다.
모든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며 온몸이 기진맥진한 체 의자에 주저앉아 있는 찬희에게, 시아버지가 옆에 다가와 앉으며 나지막이 얘기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진우한테는 그게 좀 빨리 온 거야. 그리 생각해야 네가 살 수 있을 거야."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에게 죽음이 좀 빨리 왔다고 생각하고 여태껏 버텨 오신 거였구나. 그 생각 하나만으로 젊은 나이에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올 수 있었던 거였구나.
시아버지를 볼 때마다 항상 짠하다는 생각을 해 왔었는데,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로 비치게 되다니...
순간 시아버지와 묘한 동질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런 걸 동지애라고 해야 하나.
'그래, 누구나 죽기는 하지...'
하지만 너무나 젊은 나이에 아직 어린 서후와 자신만 남겨 두고 가는 진우가 불쌍하기도 했고 야속하기도 했다.
그렇게 급하게 갈 거면 평소에 나한테 못되게나 굴지. 왜 그리도 나를 예뻐하면서 온갖 애정은 다 줬던 거야.생각할수록 원통하고 애통했다.
찬희의 처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우는 사진 속에서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마냥 웃고만 있었다.
'오빠... 오빠가 서후와 나를 위해 애썼던 순간들을, 오빠가 빛나는 하루를 살기 위해 노력했던 그 모든 모습들을 서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도록 내가 더 열심히 살아볼게.' 이렇게 마음속으로 수만 번을 되뇌었지만, 대답도 없이 사진 속에서 웃고만 있는 진우의 얼굴을 보면서 찬희는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