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간과 신장에 전이가 되어 수술도 하지 못하게 되자, 진우는 항암치료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항암치료를 받다 보니,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머리카락이며 손발톱이 성한 곳이 없었고, 음식을 먹으면 구역질과 구토가 나와서 기력 또한 극도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치료를 받았지만, 처음에는 호전되는 듯해서 진우와 찬희 모두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반복된 항암화학요법으로 인해 내성이 생겼는지, 어느 순간 약이 잘 듣지 않았다. 다른 항암 약제로 바꿔서 치료를 받기도 해 봤지만, 효과가 별로 좋지 않아서 치료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찬희는 진우가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 것도 있었다. 그건 바로 이미 예정되어 있는 운명이란 거였다.
진우의 거듭되는 항암 치료로 찬희조차도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무렵, 진우가 말했다.
"여보... 찬희야, 나 끝까지 싸워서 이 암이란 놈 한 번 이겨 볼 거야. 최선을 다해서 말이야... 그런데도, 혹시나 이 놈이 너무 센 놈이라서 내가 도저히... 더 이상 덤빌 수 없게 될 때는... 그때는... 그냥 받아들일 거야."
진우는 잠시 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렸을 때 말이야,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엄마가 그렇게도 보고 싶었어. 그런데 이미 가신 분을 더 이상 만날 방법은 없더라고. 그래서 살아 계신 아버지한테라도 잘 보이고 싶어서 그리 좋아하는 것도 아닌 공부에 매달려 보기도 했어. 그렇게 죽자고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갔지. 대학에 들어가서는 인생이 마냥 행복할 것 같았지만 대학 졸업할 때쯤엔 취업 안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새벽에는 자격증 학원, 낮에는 학교, 밤에는 아르바이트하면서 나름 알차게 하루를 보내기도 했어.
그러면서 찬희 너도 만나게 되었고 말이야."
찬희가 계속 말하려고 하는 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회사에 들어가니 얼른 너와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일을 해서 돈을 모았고, 그렇게 너와 결혼하고 나니, 널 닮은 아이를 미친 듯이 원했지. 그런데 아이가 태어날 걸 생각하니 그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더라. 그래서 외국까지 가면서 또 미친 듯이 일을 했네. 그런데도 이제 나한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더라. 이제 미친 듯이 무언가를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그 무언가에서 완전히 해방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진우를 바라보던 찬희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미친 듯이 살아왔다고 후회스럽냐고 하면, 딱히 그런 것만은 아냐.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지나온 하루하루가 내게는 빛나는 날들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아버지가 뿌듯하게 봐주셨고, 지방대이긴 하지만 국립대에서 장학금까지 받아서 나 나름대로는 내가 자랑스러웠고, 그 학교 다니면서 당신까지 만났으니까.. 열심히 한 거에 대한 보상이랄까.. 아무튼 얼마가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난 남아 있는 이 하루하루를 그냥 아무 걱정 없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해. 내게 남은 이 운명의 시간을 그냥 받아들이고 말이야."
진우가 자신이 걸어온 지나온 날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자, 찬희는 그를 바라보며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겨우 삼키며 말했다.
"그래, 오빠 열심히 살아왔잖아. 오빠가 이렇게 살아온 모습을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좋게 봐주셨을 거야. 오빠한테 살아온 하루하루가 빛나는 날들이었다면, 나한테도 오빠를 만나서 서후를 낳고 살고 있는 이 모든 하루가 빛나는 날들이야. 오빠, 예전처럼 다시 건강 찾아서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우리 같이 오래오래 살아보자. 알았지? 약속해."
진우는 아무런 대꾸 없이 찬희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찬희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찬희야, 나도 너랑 오래오래 살고 싶어. 하지만 내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이젠 장담을 할 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