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트리 정리를 마친 찬희는 방으로 들어가서 진우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방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보던 찬희의 눈은 이내 방 한쪽에 놓여 있는 4단 책꽂이로 향했다.
책꽂이에는 진우가 읽다만 책들이 꽂혀 있었고, 책꽂이 2번째 단 귀퉁이에는 누런 서류 봉투 하나가 덮개가 열린 채 꽂혀 있었다.
찬희는 책꽂이에서 봉투를 끄집어내어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서류를 천천히 꺼내 보았다.
그것은 진우의 장례식 이후 받아 놓았던 진우의 사망 진단서였다.
'아...'
서류를 보자 찬희는 그만 맥이 풀려 버렸다.
인정하기 싫었던 진우의 죽음을 병원에서조차 서류상으로 이렇게 확실하게 증명을 해주다니...
그리고 사망할 사람을 애도할 여유도 없이, 사망한 사람은 사망 후 1개월 내로 무조건 신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떠나간 사람을 서류상으로도 정리해 버리라고?'
야박한 행정 절차와 서류에 적힌 이름 세 글자에 잠깐 넋이 나가 버린 찬희는, 오늘은 그냥 쉬고 내일이나 주민센터에 갈까 싶었다. 도저히 마음도 내키지 않았고 발걸음조차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계속 미룬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면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진우의 사망 신고를 하는 게 나을 듯도 싶었다. 차마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진우의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더욱 내키지 않는 일은 주민센터를 가는 데에 서후도 함께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진우가 가고 난 뒤 찬희가 계속 집에 있게 되자, 친정엄마는 집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며 친정집으로 들어가셨다.
서후까지 데리고 가서 사망신고를 해야 한다 생각하니, 찬희는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아기를 안고 온 젊은 여자가 남편의 사망 신고를 한다...'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서류를 접수하는 주민센터 직원과 주위 사람들의 동정 어린 눈빛은 상상만 해도 진절머리 쳐졌다.
도저히 그들의 눈빛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던 찬희는 누가 알아볼까 싶어 창이 큰 모자를 깊게 푹 눌러썼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얼른 갔다 오려고, 이제는 커서 제법 무거워진 서후를 안아 올려 아기띠를 둘러메었다. 유모차에도 태우지도 않은 체 말이다.
"서후야, 엄마랑 얼른 갔다 오자."
다행히도, 걸어서 10분이면 갈 거리에서 아는 사람은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물론 집과 회사만 오고 가느라 동네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서후와 함께 도착한 주민센터에 무사히 들어서자 입구에 설치된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혼인 신고할 때는 오빠하고 함께였었는데...'
그날도 오늘처럼 주민센터의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진우와 찬희는 주민센터로 들어섰다. 신혼여행을 갔다 온 당일 오후, 진우가 혼인 신고를 하기 위해 찬희를 데리고 주민센터로 향했던 것이다.
"여행 갔다 와서 너무 피곤한데, 내일 가면 안 될까?"
꼼짝할 기력도 없는 찬희에게 진우는 자신들이 부부가 된 것을 하루빨리 만천하에 알리고 싶다고 말하며 방바닥에 누워 있던 찬희를 일으켜 세웠다.
주민센터에 도착 후 직원에게서 혼인신고서를 받은 찬희가 한글 이름인 윤찬희와 한자 이름을 적어 내려 가자 진우가 물었다.
"'찬' 자랑 '희' 자가 전부 '빛날'이라는 뜻이었어?"
"응. 빛날 찬, 빛날 희. 울 엄마가 나 임신했을 때, 꿈에서 밤하늘을 봤는데,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더래. 그런데 저 멀리서 별 하나가 그렇게 빛이 나더라네. 그래서 내 인생도 반짝반짝 빛나라고 엄마가 지었다고 하더라고."
"아! 그래서 장모님이 '빛나다'라는 걸 강조해서 이름을 지으신 거였구나."
"응. 맞아, 오빠. 아, 참! 이제부터 여보라고 해야 하는데, 여보라는 호칭이 아직 익숙지가 않다."
라고 말하며 찬희는 진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렇게 혼인 신고를 할 때 찬희는 진우와 함께여서 너무나 당당했고 둘이 함께 하는 미래가 반짝반짝 빛날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진우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제는 진우가 아닌 어린 서후를 가슴에 안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었고, 그런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에 빠지자 찬희는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주민센터에 들어선 찬희는 누가 볼까 싶어 얼른 번호표를 뽑고 대기좌석에 앉아 본인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찬희가 앉아 있던 뒷자리에서 들려왔다.
"찬희씨."
찬희를 알아본 붙임성 좋은 대박부동산 소장이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볼일 보러 오셨나 보네요."
"아... 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몰래 갔다 오려고 했는데 끝내 들키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대박부동산 소장에게.
"아, 저는 상가 계약하시는 분이 서류를 빠뜨리셔서 함께 떼러 왔어요."
굳이 묻지도 않은 얘기를 혼자서 꺼내던 대박부동산 소장과 눈도 마주치기 싫었던 찬이는 얼른 자신의 번호가 불렸으면 하고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기석에 앉아 초조하게 자신의 번호를 기다렸다.
이어서 또 귀에 익은 듯한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대박부동산 소장 곁에 이 남녀가 앉는 것을 찬희는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장님, 주차는 잘하셨죠? 근데 젊은 분들이 어떻게 이렇게 좋은 상가도 사시게 되셨어요? 대단하신데요?"
대박부동산 소장이 부부에게 물었다
"집사람이나 저나 재테크에 관심이 많아서 손품, 발품 다 팔아가며 여기저기 좀 많이 알아보고 다녔죠. 근데 소장님께서 소개해 주신 이곳이 마음에 딱 들 들더라고요. 마침 집하고도 가깝기도 하고, 집사람도 좋아라 해서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된 것 같네요."
대박부동산 소장과 대화를 나누던 남녀커플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씩 마주칠 때마다 눈인사를 주고받던 찬희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 부부였다.
찬희와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고 있는 듯한 이 젊은 부부는 직장도 같은 곳이었는지,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나 항상 함께였다. 엘리베이터 안에 비친 거울을 볼 때마다 항상 여자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남자에게 다정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우울해서 땅으로 꺼져버릴 것만 같은 자신과는 달리, 그들은 부푼 기대감으로 기분이 한껏 들떠 있는 것만 같았다. 부동산 소장은 중개 수수료를 받을 기대감에, 젊은 부부는 자신들의 명의로 된 상가가 생길 거라는 기대감에...
그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찬희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임에도 돈과 남편, 행복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만 같은 여자의 웃음소리도 듣기 거북했다.
'사람들의 귀에도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으면 좋으련만...'
혹시나 젊은 부부마저 자신을 알아볼까 신경이 쓰였던 찬희는, 그들의 대화와 웃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쓰고 간 창 넓은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 안겨 있던 서후를 달래는 척하며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직 번호도 뜨지 않은 전광판 쪽으로 다가가 자신의 번호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번호 전광판에는 진희가 받은 번호인 "48"라는 숫자가 표시되었고, 찬희는 후다닥 주민센터 직원에게로 달려갔다.
"저..."
주저하며 망설이고 있는 찬희에게 주민센터 직원이 물었다.
"네, 어떤 서류 떼실 건가요?"
"아... 저... 사망... 신고... 하러 왔는데요..."
떨리는 목소리로 찬희가 말했다.
"가족분이세요?"
"아... 네..."
찬희는 버릇처럼 자신도 모르게 "네, 처예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처'라는 말을 내뱉지 않았던 것에 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신분증을 달라고 한 주민센터 직원은 본인 확인을 위해 찬희와 찬희의 신분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순간 찬희는, 자신과 자신의 신분증을 대조해 보던 주민센터 직원의 눈빛이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분명 애처로워하는 마음과 불쌍하다는 마음을 가득 실은 눈빛이었던 것이다. 찬희는 그 눈빛을 직원의 눈에서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이 시아버지를 바라볼 때마다 해 왔던 저 눈빛. 저 눈빛을,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마다 보게 될 저 눈빛을, 오늘 이 자리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직원이 사망 신고를 하는 그 짧은 순간이 찬희에게는 억만 겁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머릿속에는 얼른 그 자리를 뜨고만 싶다는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억만 겁만 같았던 진우의 긴 사망신고가 완료되고 자신의 신분증을 받은 찬희는 직원의 눈빛을 피해 얼른 주민센터 밖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광경을 쭉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대박부동산 소장 김병욱.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출입구로 향하려던 찬희는 다시 한번 대박부동산 소장과 눈이 마주쳤다.
'제발 다시는 안 마주쳤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소장과 인사를 대신한 찬희는 부랴부랴 주민센터를 빠져나왔다.
3년 전 찬희와 진우는 서로의 직장과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를 알아보기 위해 지금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아파트 상가 1층에는 부동산이 3군데 있었고, 그중에서도 출입문이 예뻐, 제일 눈에 띄는 한 부동산이 있었다.
"대박부동산. 오빠, 우리 여기 들어가 보자."
예쁜 문을 밀고 두 사람은 천천히 부동산 안으로 들어갔다.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선 두 사람은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아파트 단지 사진들 쳐다보기에 바빴고, 그런 두 사람에게 부동산 소장은 소파에 앉아 천천히 보기를 권했다.
부동산 소장의 목소리만 들으면서 소파에 앉던 진우는 이내 벽에 붙어 있던 공인중개사 자격증에 시선이 갔다.
벽에 붙은 자격증과 부동산 소장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진우는, 순간 부동산 소장을 향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