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희가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은 작년 여름에 2년 계약이 이미 만료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우의 건강 악화로 인해 이사를 할 수가 없었던 찬희는 2년을 재계약해서, 남편이 떠난 후에도 지금의 집에서 계속 살고 있던 참이었다.
집에 보이는 진우의 짐들은 웬만큼 정리는 했지만, 여전히 집 안 곳곳에는 진우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진우의 손 때 묻지 않은 곳이 없는 집이었다.
그런 집에서 진우와 함께 했던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찬희는 가슴이 아려왔다. 지금 현재로서는 진우에 대한 어떤 기억이라도 지워버려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 전세 재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상태라서 이사도 못 가고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그런 찬희의 마음을 어떻게 눈치챘는지, 조카를 보러 집에 들른 선희가 무심한 듯 말했다.
"언니가 부동산 복비랑 이사비 대줄 테니까 이 집 정리해서 언니집으로 들어와."
또 언니에게 신세 질 생각을 하니 찬희는 선희의 제안에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무심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언니의 애정 어린 마음이 듬뿍 담긴 그 제안에 말이다.
그렇지만 회사에 복귀하게 되면 평일밤이든 주말이든, 출근할 자신을 대신해서 누구든지 서후를 함께 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듯싶기는 했다. 갈수록 기력이 쇠약해지는 친정 엄마에게만 전적으로 서후를 맡길 수 만도 없기는 했다.
머뭇거리고 있는 찬희에게 선희가 한마디 덧붙였다.
"엄마랑 얘기해서 엄마집도 같이 정리할 테니깐..."
엄마집도 정리한다는 선희의 말에 찬희는 자신이 결혼 전까지 살아온 지금의 엄마집과, 어린 시절 힘들게 살아야만 했던 엄마집에서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언덕 비탈진 곳에 자리 잡은 방 2칸짜리 복도식 주공 아파트. 찬희는 그곳에서 결혼 전까지 엄마, 아버지와 함께 셋이서 생활을 했었다. 선희는 집과는 먼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주변 원룸에서 생활하느라 혼자 자취 생활을 하던 터였다.
늦은 밤 수업을 마친 찬희가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낡은 엘리베이터 3층에서 내린 어느 날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첫 번째에 위치한 곳이 자신의 집이었다.
복도를 걸어 자신의 집 창문만 지나치면 대문을 열 수 있어서 급히 대문에 열쇠를 꽂으려던 참이었다. 그때 지나치던 창문 안에서 어렴풋이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엄마의 소리였다.
찬희는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대문을 열었고, 집 안에 있던 엄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찬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미소와는 달리 충혈된 엄마의 눈을 본 찬희는 분명 자신이 잘 못 들었던 건 아니었다 싶어 엄마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하지만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텔레비전 소리였겠지."
아무 일도 없었다며, 엄마는 찬희 네가 잘 못 들은 거라고만 했다. 그때 찬희는 순진하게도 엄마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이후로도 찬희는 어렸을 때 집이 못 사는 이유가 아버지의 벌이가 좋지 않아서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찬희가 스무 살 대학 입학하기 직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엄마와 언니의 이야기를 통해 찬희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사실을 듣게 되었다.
"엄마, 아버지 장례식에 그 여자 왔었어? 난 회사 사람들이랑 거래처 사람들 오셔서 대접하느라, 왔는지 안 왔는지 정신도 없었네."
"응. 아버지 가시는 길에 인사는 해야겠다고 하면서 잠깐 얼굴 비추고 가더라."
"아이고. 염치도 없지. 무슨 낯짝으로 거기를 찾아와."
"그래도 한 때는 죽고 못 사는 사이였을 텐데 한 번 와보고 싶었겠지." "속 터져. 엄마는 진짜 속도 좋아."
"어쩌겠니. 젊어서 혼자되고 나이 들어 자기 맘 알아주는 남자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좋았겠어."
"으이구, 마음씨만 착해 빠진 엄마 땜에 내가 못 살아. 아버지가 유부님인 거 몰랐으면 모를까 어떻게 한 동네 살면서 그럴 수가 있어? 그날도 내가 아버지랑 그 여자랑 같이 가는 거 길에서 못 만났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거 아냐. 하긴 말해 줘도 엄마는 별 반응도 없었지만."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뭐 어쩌겠니. 들어오는 돈은 적고, 찬희 학교는 보내야 하고... 그리고 저러다 다시 돌아오겠지 싶었고."
"아버지 장례식 때 온 줄 알았으면 내가 그 여자 머리끄덩이라도 실컷 잡아당겨 줬을 텐데. 아버지 돌아가신 건 맘 아프지만 그것만 생각하면 분통 터진다니까."
아버지가 한 동안 집에도 잘 안 들어오신 건 일당 벌이하는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밤낮없이 바쁘신 탓이라고만 어린 찬희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한참 공부하느라 바빠서 찬희 또한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와 언니의 대화를 통해서야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울음소리 또한 자신이 잘 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때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는 왜 그 여자한테 아무 말도 못 했어? 왜 가정 있는 남편 건드렸냐고... 왜 가정 있는 남자가 다가와도 뿌리치지 못했냐고... 엄마는 그렇게 충분히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 아니었어?'
이렇게 말이다. 왜 엄마는 그 여자에게 큰 소리 한 번 치지 않았을까?
설마 엄마는 자신의 딸도 그렇게 외로운 여자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걸 미리 예견했던 걸까? 그래서 그 여자에게서 자신의 딸의 모습이 투영되어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못했던 걸까?
울분에 차 있던 선희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하자 찬희는 순간, 자기 자신이 두려워졌다.
'나도 외롭다는 이유로 어느 누군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어느 누군가에게 나 또한 분노와 울분의 대상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현재의 자신이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단호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서후를 놔두고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절대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줄 일도,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목 박을 일도...'
하지만 미래의 자신이라면? 미래의 자신 또한 그러하리라고는 장담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찬희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다 선희의 이어지는 말에 찬희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엄마도 그 오래된 집에서 이제 이사 나올 때도 됐고."
선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찬희도 결혼 후에 혼자 남은 엄마를 곁에서 지켜 드리고 싶었지만, 또다시 엄마의 집과는 많이 떨어진 신도시의 한 지점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발령받은 얼마 동안은 엄마의 집에서 자차로 출퇴근을 했었지만, 얼마 뒤 선희는 핫하다는 그 지역의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경쟁률이 높지 않은 평수와 타입에 지원해서 운 좋게 당첨된 것이었다. 그리고는 입주 시점에 엄마집에서 나와 새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어차피 서후를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키울 수 없는 노릇이니까, 찬희는 누군가가 도와준다고 손을 내밀 때는 뿌리치지 말아야겠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한다 안 한다 대답도 없이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는 찬희에게 집을 나서던 선희가 말했다.
"정 신경 쓰이면, 아파트 관리비는 니가 내던가."
그러면서 집으로 가는 길에 아파트 상가에 있는 부동산에 들러 전세 매물로 접수해 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대박부동산 김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박부동산 소장만큼은 피하고 싶던 찬희는 그에게서 전화가 오길래 처음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바로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찬희 씨, 대박부동산 김병욱입니다. 지금 집 보러 가신다는 분 계신데, 혹시 댁에 계실까요?"
선희가 끝내 집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찬희는 선희에게 바로 톡을 보냈다.
"혹시 대박 부동산에 전세 냈어?"
뒤이어 선희에게 답이 왔다.
"응, 거기 너희 이사 올 때도 한 곳 아냐? 그래서 거기 접수했는데?"
하고 많은 부동산 중에 하필 거기에 매물 접수를 했다는 선희에게 그냥 알겠다고만 답변을 넣은 찬희는, 김소장에게도 바로 문자를 발송했다.
"네. 지금 오셔도 됩니다."
10분 뒤 김소장은 젊은 부부 한 쌍을 데리고 왔다.
여기저기 꼼꼼하게 집을 보고 있는 부부에게 김소장은 말했다.
"구조도 좋고, 평수도 적당해서 신혼부부가 살기에는 딱이에요. 버스 정류장이 바로 앞이라 교통도 좋고요."
명쾌한 목소리로 안내하던 김소장은 집 구경을 마친 젊은 부부를 천천히 따라가다, 뒤를 돌아보며 찬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비수기라 거래는 잘 없지만, 최대한 빨리 성사시켜 볼게요."
그 말만을 남긴 체 사라지는 김소장을 보니 찬희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안심이 되었다. 영업력이 좋은 그가 중개한다면 거래는 빨리 성사시켜 줄테고, 이사를 가게 되면 그와 더 이상은 마주 칠 일이 없을 거라는 안도감 정도라고나 할까.
그 뒤로도 3일 동안 김소장은 4명 정도를 집에 더 데리고 왔고, 그중 한 젊은 여자가 저녁에 남편과 같이 오겠다고 하고는 다시 저녁에 찾아와서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리고는 그 집을 계약할 거라고 다음날 아침 가계약금을 걸었고, 급히 집이 필요하니 늦어도 2주 안으로는 이사를 들어올 거라고 했다.
그러다 예상보다 그들의 이사 날짜가 빨리 앞당겨져 지면서, 가계약금을 건 날로부터 1주일이 지난 토요일 아침,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집으로 들어왔다.
찬희는 언니가 불러준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짐을 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차마 버릴 수는 없어서 놔두었던, 진우가 퇴근 후에 앉아 있던 소파, 진우가 읽던 책들이 꽂힌 책꽂이, 진우와 함께 밥을 먹던 식탁까지 모두 이삿짐센터의 직원들이 폐기를 하려고 집 밖으로 들어내고 있었다.
들어내고 있는 짐들을 보며 진우와의 추억이 서려있는 이 집과는 이제 완전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찬희의 마음 또한 도려내는 듯 아파왔다.
하지만 그와의 이야기들은 이제 기억 속으로만 남겨 둔 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하며 찬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