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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찬스 Nov 09. 2024

[소설 19화] 허황된 꿈만은 아니었어


열심히 자신의 연둣빛 경차를 달려 새벽 출근을 하니 언제나처럼 옆 브랜드 수현언니가 그녀를 따스하게 반겨주었다.

"고생 많았다. 찬희야."

수현이 찬희를 살포시 안아 주며 말했다.

"언니, 많이 바쁘셨을 텐데, 그날..."

찬희는 수현에게 '그날'이라는 단어를 꺼내면서 갑자기 목이 메어왔지만, 북받쳐 오려는 눈물을 꾹 참고 말을 이어갔다.

"와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고마움을 담은 한 줄의 간단한 말이었지만, 찬희에게는 그 쉬운 문장 하나 말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또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찬희는 수현에게 진우의 장례식에 참석해 준 감사 인사를 전했고, 수현은 그때도 감사 문자를 줬으면서 뭘 또 새삼스럽게 인사하냐고 하며 멋쩍게 웃었다.


손님이 없는 간간히 수현과 얘기를 나누던 찬희는 최근 면세점 돌아가는 분위기를 들을 수 있었다.
휴직 전과 휴직 후가 많이 달라진 찬희와 마찬가지로 회사 또한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스카이 면세점 부점장도 최근 오승기로 바뀌었다고 수현이 알려 주었다.

"승기 님이라면 은영 언니의 남편이요?"

"응. 맞아."

진우의 장례식 때 은영은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했었다. 남편과 해외여행 중이라는 이유로 친구인 선희를 통해 부의금만 전달한 것이었다. 그게 미안했는지 은영은 출근하면 찬희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신신당부했었고, 이미 출근길에 카카오톡으로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을 해 놓은 상태였다.

'아! 승진 기념 여행이었구나.'

그런 이유로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된 찬희는 은영언니를 만나면 바로 남편의 승진을 축하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은영 남편의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으면서 떠오른 진우 생각에 찬희는 자신도 모르게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른 사람의 축하를 앞에 두고도 자신은 왜 서러운 마음만 드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손님들 앞에서, 여러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청승맞게 보일 수는 없어 찬희는 있는 힘껏 입술을 꽉 깨물며 근무를 이어갔다.

휴직 후 출근 첫날을 좀 더 알차게 보내고자 했던 찬희의 바람과는 달리 눈물 반, 주변 사람들의 위로 반으로 시간을 어영부영 보내고 나니, 이미 시간은 오후 근무자의 출근 시간인 12시 반이 다 되어 있었다.

찬희는 오후 근무자로 출근한 지윤에게도 그날의 참석을 감사해했다.

지윤과는 긴 얘기할 틈도 없이, 은영과 약속한 시간인 12시 반이 되기 직전 은영이 기다리고 있을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오후 출국을 기다리며 식사를 하고 있는 손님들 속에 은영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찬희에게 손을 흔들었다.

"찬희야, 여기!"

"언니, 먼저 와 계셨네요."

"그래. 많이 힘들었겠다. 찬희야. 그동안 고생 많았지?"

찬희에게 건네는 사람들의 인사말은 한결같았다.
"고생 많았지?" 그러나 고생이라면 자신보다는 긴 고통에 시달렸던 진우의 몫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찬희는 힘겨워하던 진우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조차도 고생이라면 고생이었을 테니까...

"아니에요, 언니. 그때 챙겨 주셔서 감사했어요."

"에구, 무슨 소리! 그날 못 가서 미안했어."


은영은 마침 결혼 20주년이기도 하고 남편의 승진 축하도 할 겸해서 오랜만에 둘이서만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새해 첫날 창 밖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진우가 말했었다.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서후 때문에 먼 곳은 못 갈 테니, 가까운 일본에나 가자"

그렇게 말해놓고는 약속도 지키지 않고 혼자서만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 버린 남편이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올해 결혼기념일에는 먼 여행을 떠난 그 사람 때문에 당사자도 없이 혼자서 쓸쓸한 기념일을 맞을 것이다.

혼자만의 결혼기념일이라는 생각에 잠시 우울함에 사로잡혔던 찬희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음식을 주문하는 은영에게 말했다.

"언니 덕분에 이렇게 일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살며시 미소 지으며 은영이 답했다.

"아냐.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은영과 이야기를 나누던 찬희는 문득 면세점에 들어오기 전, 자신의 대학 시절이 생각났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에 대해 불안해하던 그 시절, 은영이 선희를 통해 알려준 면세점 아르바이트 자리는 찬희에게 또 다른 기회를 안겨 주었다.

"4학년 때 이래저래 고민 많았었는데, 언니가 아르바이트 추천해 주셔서 지금까지도 일할 수 있게 됐네요. 언니에게는 항상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나야 소개해 준 것 밖에 없는데 뭘. 그리고 네가 열심히 한 덕분에 이 자리에 있는 거고."

아르바이트로만 생각했던 그 일을 시작으로 운 좋게 브랜드 소속 정직원이 될 수 있었고, 정직원이 된 찬희는 지금까지도 만족스럽게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자신의 노력을 은영이 허투루 보지 않은 덕분이라는 생각에 찬희는 항상 은영이 고마웠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찬희를 봐왔던 은영의 입장에서는 훌쩍 커서 자신의 앞에 직장 동료로 마주하고 있는 찬희가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마음도 아팠다.
요즘에는 30, 40대에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30대 초반에 이미 남편을 잃은 아이 딸린 미망인이라니... 그 사람이 자신조차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찬희라는 생각에, 은영은 그녀를 보는 내내 마음이 저려왔다. 그런 은영을 보며 찬희가 꺼내기 힘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남편이랑 아이 키우면서 행복하게 잘 살기만을 바랐어요. 근데 제 욕심이 너무 컸던 거였을까요?"

"음... 결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꿈인 거지. 그 게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잖아."

은영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꿈을 크게 가진다는 것 자체는 욕심이 아니야. 아무런 노력도 안 하면서 좋은 기대를 바라는 게 욕심인거지. 그래도 넌 할 만큼 다 했잖아."


"제가 할 만큼 한 건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남들보다 앞서 가려고 이른 나이에 결혼했는데, 아이는 남들보다 또 늦게 가져지더라고요. 늦게서야 겨우 아이를 낳았더니, 이제 남들보다 앞서서 남편이 가버렸어요. 인생이란 앞서거니 뒤서거니 참 알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아요."

아기 때부터 봐 와서 여전히 찔찔이 어린 애라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닥친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누구보다 생각이 깊어진 찬희가 은영의 눈에는 자신보다 더 어른스럽다고 생각되었다.

"참, 부점장님 사모님 되신 거 축하드려요! 축하 인사를 먼저 드린다는 게 깜빡했어요."

"에이, 그게 뭐라고. 너 말마따나 인생이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인데, 그 사람이나 나나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암튼 축하해 줘서 고마워."

그렇게 두 사람은 선뜻 꺼내기 힘든 서로의 마음들을 반찬삼아 꺼내 놓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식사를 해결해야 했던 두 사람은, 커피는 테이크 아웃해서 면세점으로 걸어가며 마셨다.


은영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인생을 더 산 사람의 입장에서 찬희에게 더 힘이 되는 말들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인생의 쓴 맛을 알아버린 찬희에게 그런 충고의 말들이 더 필요할까 싶어 마음속으로만 되뇌일까 하다, 다시 용기 내어 멈춰 서서 찬희에게 말했다.

"찬희야. 앞으로 살면서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많이 닥칠 수도 있을 거야. 그래도 지금까지 힘든 시기를 잘 견뎌온 너인 만큼, 앞으로도 네게 남은 인생을 잘 헤쳐 나가리라 믿을게. 넌 분명히 잘해 낼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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