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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찬스 Nov 11. 2024

[소설 20화] 달고나 같은 내 인생


점심 식사를 마치고 매장을 돌아온 찬희는 매니저인 지윤 앞에 섰다.

"매니저님, 저 서후를 생각해서라도 이제 더 열심히 일해야 할 것 같아요."

찬희의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지윤이 말했다.

"그래, 찬희야. 너나 나나 남편한테 기대고 살 수만은 없지만 세상 일 어찌 알겠어? 엄마가 열심히 사는 모습 보고 자란 우리 아이들은 나중에 더 멋지게 살 수 있을지."

"네, 지금은 아무 걱정 없이, 오로지 이번달 목표 달성할 것만 생각할래요. 인센티브를 받아서 우리 서후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그래요, 찬희 님. 우리 이번 달에도 열심히 해 봐요. 파이팅!"

지윤은 주먹을 꽉 지어 보이며 굳은 결의를 다짐했다.
찬희 또한 서후를 위해서라면 힘들어도 꼭 이겨내리라 다짐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던 다음 날 막내 직원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연락이 왔다. 몸이 좋지 않아 며칠 출근이 힘들겠다는 거였다.
3명이서 장시간을 근무해야 하는 매장에서 1명이라도 출근을 못하게 되면 대타 아르바이트를 써야 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휴무에 대타 아르바이트를 찾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고,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지윤에게 찬희가 말했다.

"제가 대신 근무할게요."

찬희는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일할 생각에 걱정은 되었지만, 매장에서 몇 시간 더 일한다고 몸에 큰 무리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회사에서 허용 가능한 시간 이외에는 연장 수당을 받을 수 없을 거라고도 지윤이 말했지만, 찬희는 매장을 위해서, 매장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크게 문제 될 것 없다고 말하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서후와 같이 있을 시간이 좀 줄어들어 걱정이 되긴 했지만, 집에서는 이제 엄마와 선희가 번갈아가며 아이를 봐줄 수 있었다. 그리고 서후 또한 이제 한 살이라도 더 먹어서 인지 아기 때처럼 그렇게 손이 많이 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긴 근무를 하던 3일째 날이었다.
찬희는 출근을 하기 위해 여느 때처럼 새벽같이 잠에서 깼다. 새벽 녁에 못 일어날까 싶어 몇 번 뒤척이기는 했지만 다행히 눈을 떴으니 얼른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화장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과는 달리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행동이 재빠른 평소의 자신과는 달리,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누르고 있어 몸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머리를 감고는 화장을 한 후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에 내리자 지하주차장도 항상 보아 왔던 그곳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조급한 기분 탓인가 싶어 자신의 연둣빛 경차에 올라탄 찬희는 시동을 걸어 보았다. 그런데 이 또한 어찌 된 일인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 추운 바깥 날씨 때문인가 싶어 다시 시동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미동도 않는 차에서 마냥 한숨만 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시동이 안 걸린다고 연락할 진우도 옆에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찬희는 지하주차장을 걸어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신호등은 빨간색으로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였다.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이미 버스가 도착하는 정각 6시가 되어 버렸다.

​그때 횡단보도 건너편에 버스가 도착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찬희는 신호등이 빨간 불이든 파란 불이든 상관없이 버스를 향해 돌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또 발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저 버스를 놓치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찬희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목 안에서만 맴돌 뿐 어떤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찬희는 다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보았다.

"자... 잠시만요!"

하지만 찬희의 소리가 들릴 리 없던 버스는 찬희의 외침에도 아랑 곳하지 않고 쌩하니 찬희를 지나쳐 버렸다.

잠결에 지른 찬희의 소리가 너무 컸던 탓인지,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 오셨다.

"엄마나, 찬희야! 6신데 아직 자고 있었어?"

당연히 이미 출근하고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방 안에서 딸이 늦잠을 자고 있자, 엄마가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엄마! 어떡해! 아이고! 미치겠다!"

휴대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한 찬희는 용수철처럼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단 최대한 빨리 출근해서 오픈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던 찬희는 얼굴만 대충 씻고 집에서 나와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게 꿈이 아니었겠구나.'

아무리 열심히 차를 달려 보았지만, 역시나 오픈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면세점에 도착할 수 있었던 찬희는 아무리 피곤했다 한들 제때 일어나지도 못해 지각하게 된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열심히 하고자 했던 굳은 의지와는 달리 이런 불상사가 생기다 보니 새벽부터 너무 무기력해진 찬희는 일에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디스플레이되어 있던 마네킹처럼 꼼짝 않고 매장에 서서 한 곳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매장 앞을 지나가던 한 젊은 여자가 찬희에게 소리쳤다.


"아까부터 왜 자꾸 째려보는 거예요?"

부인의 화내는 소리가 들리자,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고 있던 남편이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여자가 새벽부터 재수 없게 자꾸 나를 째려보잖아."

여자가 남자의 팔짱을 끼며 뾰로통하게 이야기했다.
너무 당황해서 정신이 번쩍 든 찬희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이유도 모를 사과를 해야 했다.

"어머나, 고객님. 죄송해요.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 어쩌다 보니 고객님만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나 봐요. 절대 째려본 거 아니니까 오해 푸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찬희는 자신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두 사람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고, 두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찬희, 정신 좀 차리자. 제발.'


찬희는 새벽부터 지각에, 손님 클레임에 시달리다 보니 자신이 쓸모없고 하찮은 존재인가 싶어서 가슴에 누군가 큰 바위를 올려놓은 것 마냥 마음이 무거워졌다. 서후를 위해서는 힘들어도 참겠다던 그 자신감은 어디에 있는 건가 싶었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힘겨운 날에 누군가가 옆에서 자신을 위로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그 누군가는 이 세상에는 없는 단 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오전 근무를 끝내고, 찬희는 밥짝지인 려화와 함께 식당을 향했다.
식당 내 뉴스에서는 중국발 바이러스에 걸린 환자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었다. 뉴스를 보며 려화가 말했다.

"저 코로난가 뭔가 하는 환자들이 자꾸 나오나 봐요."

"그러게. 저건 또 뭐래? 몇 년 전에는 메르스 때문에 한 동안 손님이 없어서 맘고생 좀 했었는데, 그거 지나간 지 몇 년 됐다고 또...'


"그러게 말이에요. 근데 언니, 수현 언니 아들 카이스트 합격했다는 소식 들었어요? 그 과학고 다닌다는 아들."

"어머나, 정말? 수현 언니 나한테는 안 알려 주고..."

수현이 자신에게는 아들의 경사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찬희는 잠시 수현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찬희는 곧 수현에 대한 섭섭함을 접었다.
수현의 아들이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함께 도서관에 다니며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커 왔다는 걸 아는, 찬희에 대한 수현의 배려였으리라 생각하며...

늦은 퇴근 후 찬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째 장시간 근무로 인해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 어깨가 내려앉을 듯했다. 하루 종일 서 있느라 퉁퉁 부어 버린 다리를 질질 끌고 서후가 놀고 있던 방 안에 들어서니 이제 제법 키가 커 버린 서후가 서서 벽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잠잘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자지 않고 엄마를 기다리던 서후는 낙서를 하다 말고 찬희를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런 서후에게 찬희는 소리쳤다.

"서후야, 누가 벽에 낙서하라 했어? 여기 이모 집인데 이렇게 낙서하면 이모가 싫어하는 거 몰라?"

그러면서 찬희는 서후의 엉덩이를 소리 나게 팡팡 고, 자신의 반가움과는 달리 엄마의 화난 손바닥에 깜짝 놀란 서후는 엄마가 지른 소리만큼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으앙!"

서후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 엄마는 거실에서 TV를 보다 말고 달려왔고, 서후가 고사리손으로 그린 벽면의 그림을 보며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서후 놀랐겠네. 할머니가 안아줄게."

엄마는 찬희에게 아이가 몰라서 그런 건데, 뭘 그리 다그쳤냐고 찬희에게 말했다.

그제야 자신이 어린 서후에게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괜한 오기가 생긴 찬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 싫어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는 서후 버릇 나빠지게 그러면 어떡해? 애가 무서워할 남자도 집에 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엄마 보고 반가워하는 애한테 너무 그러지 마라. 그렇다고 이모가 벽에 낙서 한번 했다고 조카 미워할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내일 요 앞 문방구 가서 스케치북 사다 놓을게. 그럼 됐지?"

엄마는 그러면서 서후를 안고 거실로 나가버렸다. 못 이기는 척 함께 거실을 따라 나간 찬희는 TV화면에 시선이 갔다.
TV 화면에서는 트롯 경연 프로가 한참 흘러나오고 있었다.

트롯 따윈 관심 없어 욕실로 향하던 찬희에게 엄마가 말했다.

"저기 나오는 젊은 가수가 노래도 정말 고급지게 잘 부르던데 우리 서후처럼 어릴 적부터 아빠 없이 살았다네. 그런데도 사람이 참 선하고 바르게 잘 자란 것 같더라."

그러면서 엄마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 서후도 저 총각처럼 잘 자라서 이름난 사람 되면 좋을 텐데."


찬희는 자신 또한 서후를 아비 없이 자란 아이라는 손가락질을 안 받도록 키우기 위해 항상 신경이 쓰였었다. 하지만 엄마마저 자신에게 그런 압박을 준다고 생각하니 오전에 느꼈던 마음의 중압감이 또다시 밀려와서, 찬희는 엄마의 말이 안 들리는 척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다시 뭔가 생각난 듯 찬희에게 들어랍시고 큰 소리로 얘기했다.

"너 요즘에는 가사 쓰는 거 안 하니? 그 대학교 1학년 땐가 만들었던 노래 그 뭐더라? 그.. 그.."

엄마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다시 뭔가 기억이 났는지 손바닥으로 소파를 치며 말했다.

"맞다. 달고나. 네가 만들어서 부르던 그 노래가 엄마 맘에 들어서 지금까지도 한 번씩 따라 부르고 있는데."

이윽고 엄마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뾰족한 바늘에 찔리고 찔려
무수히도 부서졌던 나

아무리 애를 쓰고 애를 써봐도
맞춰지지 않는 내 세상

하지만 이대로는 포기할 수 없어
언젠가는 달콤해질 내 인생을 알기에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늘도 내 인생 정말 달고나"

자신이 만든 노래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엄마 덕분에 다시 기분이 누그러진 찬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엄마에게 웃으면서 말을 붙였다.

"우와! 엄마는 아직까지 그 노래 기억하고 있어?"

"그럼. 대학교 1학년이 쓴 거 치고 꽤 인생을 많이 살아 본 사람이 쓴 것 같은 가사라서 엄마 가슴에 참 와닿더라. 그래서 엄마는 그때 우리 찬희가 참 대견했었지. 요즘에도 한 번씩 글은 쓰고 있어?"


엄마의 물음에 찬희는 하소연하듯 대답했다.

"에이, 그때야 노래랑 책에 푹 빠져 살았지. 지금이야 출근하기도 바쁘고, 퇴근하면 서후랑 놀아주기도 해야 하니까 그런 거 신경 쓸 겨를도 없고. 작년에는 서후 아빠 때문에도 정신없었고..."

"그렇긴 하다만..."

찬희는 서후 아빠 얘기를 꺼내며 엄마 앞에서 울먹거리기는 싫어서 곧바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응. 이젠 하루에 일기 한 줄 쓰기 힘든데 뭘."

큰 한숨을 내쉬는 찬희에게 엄마가 말했다.

"그래, 찬희야. 지금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힘들 테지만, 그래도 시간 날 때 한 번씩은 예전처럼 글도 쓰고 해 봐.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말이야."

찬희는 엄마의 위로를 들으며 마음속 깊은 곳 어디에선가 올라오는 따스한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지금이야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내게도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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