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결혼을 할 즈음 마련한 보급형 dslr 카메라가 시작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비싸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당시 내게는 상당히 큰 돈이었다. 문득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평범한 시각과 시야가 아니라 남들과 다른 세상을 보고 기록하고 싶었다. 다소 무리를 해서 사들인 카메라로 하루하루가 생동감있게 느껴졌다. 잿빛 빌딩 숲에서 무신경하고 무표정한 내 표정이 푸릇푸릇한 풀들과 갓터트린 꽃봉오리처럼 싱그러워졌다. 내가 보고 느끼는대로 내 표정이며 기분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의 힘이었다.
그런데 난 착각하고 있었다. 사진의 힘이 아니라 카메라의 힘으로 생각했다. 좀 더 좋은 카메라라면 더 좋은 사진을 '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그 생각이 종교처럼 확고해졌다. 아이의 모습을 담기에 차고 넘치는 카메라인데도 왠지 부족해 보였다. 내 아이의 생동감있는 표정보다 더 비싼 카메라로 찍은 남의 아이가 더 예뻐보였다. 카메라에 미치기 시작했다.
쥐꼬리만한 월급이었다. 물론 하는 일도 쥐꼬리만한 일이었다. 쥐꼬리를 네 식구가 부여잡고 한달한달 어렵사리 연명했다. 물론 그 속에 소소한 행복감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는거구나. 이렇게 예쁜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게 더 좋은 카메라가 필요한 이유가 마구마구 솟아났다. 카메라는 값싼 취미가 아니라는 말이 피부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게 그런 말은 당연함으로 여겨졌다. 비싼 카메라여야 예쁜 아이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형용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름신이 내려앉았다.
IMF의 여파로 금리는 천정부지로 높았고 난 가장 높은 금리를 낚아채는 천재개미가 되어 은행으로부터 대출승인을 따내는 행운을 얻었다. 대출이자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생활비를 줄어들었고 엥겔계수는 만땅을 찍을락말락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름신은 언제나 내편이었다.
그렇게 사들이고 바꾸고 더했다. 카메라는 카메라로 끝나는 취미가 아니었다. 카메라 본체, 렌즈, 스트로보, 필터, 트라이포드, 카메라가방 등등 렌즈는 한 개만 존재하지 않았다. 붕어눈알 닮은 렌즈에서부터 이른바 대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망원렌즈까지. 모든 화각을 담을 수 있어야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믿음은 사이비종교의 교리보다 비논리적이었지만 그래서 더 설득적이었다. 그렇다고해서 사진을 열심히 찍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어느날
먼지 뽀얗게 내려앉은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광각, 표준, 망원을 아우르는 렌즈를 들고 아이들 사진을 찍으러 밖에 나가본 적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아이들 학예회에도 맨손으로 가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는 제 역할을 못한채 먼지만 덮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필요한 사람에게 가라.
중고나라에 그동안 손때뭍은 카메라를 내놓았다. 일괄, 직거래, 주말할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워낙 저렴하게 내놓았던터라 금방 거래자가 나타났다. 우리집에서 상당히 먼 거리였는데 3살배기 어린 딸을 대동하고 세식구가 나들이겸 우리집에 들렀다. 거래는 30분이 채 되지 않아 체결되었고 온라인으로 몫돈이 내 통장에 무사히 들어왔다. 지름신은 없다.
마침 가계경제가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내는 그 몫이 생활비로 쓰여질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럴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이 돈은 오직 나를 위해 쓸 것이다.
카메라에 묶여있던 돈이 현금화되고 더이상 사진이 취미가 되지 않은 내게 난 어떻게든 이 돈이 사라지지 않고 나를 위해 충성을 바치게 하고자 했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이 중고휴대폰과 스마트폰용 짐벌 그리고 마이크였다. 제버릇 개 못준다고 사진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사진이 아니라 영상을 찍기로 마음먹었다. 어느날 책을 읽다가 읽게된 한 구절이 나를 바꾸었다.
지금 찍는 이 사진이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순간이다.
그렇다. 나는 나의 가장 젊은 순간을 담아두고 싶어졌다. 아이들의 재롱잔치도 끝나가고 사진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차선이 아닌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지가 내게 주어진 것이다. 난 그것을 "노후대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세운 노후대책은 이렇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두는 것이다. 그리고 30년 뒤에 다시 꺼내보는 것이다. 30년 뒤라면 내가 일흔의 나이를 훌쩍 넘겼을 때다. 경제적으로 넉넉해 매년 해외여행을 하더라도 1년 중 360일은 집이나 집근처를 배회할게 분명하다. 집에서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 것인가.
한마디로 내 노후대책은 지금부터 찍은 사진과 영상을 꺼내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자주 바라볼 것이다. 아울러 아이들과 더욱 친밀한 시간을 보낼 것이며 아내와 더욱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내가 들이대는 영상장비에 거부감없이 나를 대하듯 할테니 말이다. 목적을 위해 가식적이지 않을 것이다.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30년 뒤에도 나를 보고 웃어줄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그게 내 노후대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