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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Feb 13. 2018

제주도에서 첫날밤

부자여행:제주편#06

숙소에서 3분도 채 걸리지 않는 바다는 저 멀리 오징어 배를 경계로 바다와 하늘을 구분할 수 있을 뿐 깜깜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만으로 된 어촌마을의 한적함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재미를 찾지 못한 진우는 돌아가자는 말로 첫 바다관람을 마감했다. 육지로 따지면 이른 시간인데다 이른 저녁도 먹어버린 탓에 저녁시간을 뭐하며 보낼지 생각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진우와 놀아줄 사람은 없었고 일단 다시 차를 타고 먹을거리를 사오기로 했다. 다행이 멀지 않은 곳에 대형리조트가 있어서 그 주위에 상점들이 즐비했다. 간단하게 과자 몇 개만 사들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가 돌아왔을 땐 새로운 게스트들이 들어와 아까보다는 생기가 돌았다. 다들 각자의 여행에 몰두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무도 자기를 상대해 주지 않는 진우에겐 여간 심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린 마트에서 구입한 과자를 한 봉지씩 뜯어 먹으며 파주의 엄마와 동생과 영상통화로 각자의 안부를 물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전화 너머 식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있어서 길게 통화하지는 못해서 더욱 아쉬운 듯한 눈치였다. 전화를 끊고 진우는 1층 숙소와 2층 놀이방을 몇 차례 왔다갔다 반복하더니 그것마저 심심해졌는지 놀이방에 비치해 둔 책들로 관심을 돌렸다. 다행이 그곳에 진우가 보지 못한 책들이 있었다. 놀이방에는 새둥지 모양의 안락가 있었다. 연인들이 함께 앉아 기념사진도 찍고 사랑도 속삭일 만한 의자였다. 진우 혼자 그 자리를 독차지한 채 한 권, 두 권 그렇게 읽던 독서시간은 길어졌다. 나도 나 나름대로 가져간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소일했다. 한 공간 다른 자리에서 우린 여행이 주는 각자의 시간을 즐겼다. 어느덧 시간은 잘 시간을 지나 여행 첫날밤은 깊어만 갔다. 내일은 어딜 갈지 무엇을 할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그냥 잠들어 버리기로 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밤이 늦은 걸 확인하고 서둘러 씻은 후 늘 그랬듯이 진우는 2층 침대의 2층으로 올라갔고 난 진우 아래 층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둘뿐이라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비행기 조종사도 아니면서 기장과 부기장처럼 오늘 비행이 어땠는지 평가했다. 대기불안이 조금 있긴 했지만 괜찮았고 착륙하는 데 다소 진동이 있었지만 크게 신경쓸 건 아니었다는 것으로 나쁘지 않은 비행점수를 매겼다. 그리고 처음 타보는 또봇 더블유(레이)가 생각보다 넓고 좋다는 등 진우는 제주여행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우리의 여행에 대한 복기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밤이 더 늦어지면서 내가 내일 아침에 해뜨는 거 보러 가야하니 어서 자라고 했다. 그런데 진우가 뜬금없이 해뜨는 거 보기 싫단다. 이유를 물어봐도 신통한 답변이 나오진 않았다. 그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주에 온 이유 중에 하나가 멋진 일출을 진우와 함께 보는 거였는데 진우의 반대로 그 이유 하나가 사라질 위기였다.


1월 1일 첫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은 많다. 나 또한 그 해를 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남들 가는 정동진도 가봤고 동해안 유명 해돋이 명소도 가봤다. 제대로 된 해돋이를 본 적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의 일출을 보는 것은 무언가를 함께 시작한다는 점 때문에 의미가 더욱 큰 것같다. 나도 진우와 뭔가 의미있는 것을 함께 하고 싶었다. 게다가 여긴 제주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해돋이를 보기 위해 제주도를 찾는다. 연말에 제주까지 와서 해돋이를 안 본다니. 자식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내 욕심이 발동했다. 나는 진우에게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섬 중에 제주도가 가장 멋진 곳이라며 설득했다. 하지만 진우의 입장은 변할 줄 몰랐다. 밤도 늦었고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아 우선 자자고 했다. 어차피 우리에겐 두 번의 아침이 있으므로 그 다음날 다시 일출에 도전해 보기로 하고 일단 알았다고 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진우가 내려와 내 품으로 파고 들어서 잠이 깼다. 창밖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단조로운 검은색이었다.


“아빠. 다리 아파요”


여행와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진우였다. 2층에 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그럴리 없을 텐데 다리가 아프다니. 오늘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아프다고 주물러 달란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새벽 1시 반을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여행 중에 다리가 아프다는 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내일 여행이 아픈 다리로 인해 모두 무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일은 진우가 그토록 좋아하는 자전거를 탈 계획인데 큰일이다.


진우 말대로 아픈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십여 분 주물러 주니 괜찮아졌다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진우는 그 이후에도 두어번 더 내 침대로 내려와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했다. 다리가 너무 아프면 내일 자전거 타지 말자고 했더니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 같단다. 집에서 자고 있을 우리집 둘째 꼬맹이였으면 아프다고 징징거렸을 텐데 진우는 다행히 울거나 보채지 않았다. 내일 여행이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일출은 사치스런 생각이었다. 부디 별 탈 없이 아침을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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