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
어른이 되어서 읽는 그림책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가와이 하야오 이야기상의 주체자이기도 한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는 공저한 <그림책의 힘>에서 평생 3차례에 걸쳐 그림책을 봐야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가 읽어주고,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읽어주고, 그리고 나이가 들어 다시 그림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지요.
나이가 들어서도 그림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살아온 시간만큼 저마다 상흔을 지닌 사람들에게 '간결하게, 하지만 인간의 깊은 내면을 울리는 장르' 그림책은 '치유'의 손길을 내민다는 것입니다. 그림과 어우러진 짧은 글은 각자 지나온 삶의 우물 속에서 저마다 다른 '사연'을 퍼올립니다.
윤여림 작가가 글을 쓰고, 안녕달 작가가 그림을 그린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도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그 누구라도 결국은 눈가가 시큰해지고야 마는 그림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두 아이를 키웠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다 결국 '엄마'인 제 자신에게로 돌아온 이야기에 가슴이 뻐근해졌습니다.
애착과 분리불안, 관계의 양 면
'분리 불안'은 이제는 대중적으로도 낯설지 않은 심리학 용어업니다. 말 그대로 '떨어지기 싫어하다 못해 불안'해 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보통 아이들이 '낯을 가리'기 시작하는 생후 6~7개월 무렵부터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분리 불안'과 '애착'은 '관계'의 양면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애착'이 생기면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 드는 거, '인지상정'이죠. 그런데 사람 살이가 어디 그런가요. 우리는 부모 자식이든, 사랑하는 연인이든, 혹은 주인과 애완 동물의 사이라도 늘 함께 할 수는 없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신을 돌보는 '대상'과의 애착에 대해 학문적으로 '정립'한 학자는 영국의 존 볼비입니다. 볼비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영국의 중상류층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유모에게 맡기고, 조금 크면 기숙학교에 보내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어머니 대신 유모에게 애착을 가졌던 볼비는 7살에 보내진 기숙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이후 그의 학문적 방향을 정하게 되었지요.
헝겊 엄마에 애착을 보이는 해리 할로우의 원숭이 실험, 그리고 갓 태어난 오리가 처음 본 사람을 엄마로 인식하는 로런츠의 '각인' 이론 등을 기반으로 존 볼비는 현대 사회의 기반이 된 '모성 애착 이론'을 만들어 내습니다. 일반적으로 '애착'과, 그에 따른 분리 불안은 '보호'를 받는 대상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 와도 문 앞에서 목 놓아 울었지.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문을 두드리며 울고,
엄마가 잠깐만 안 보여도 네가 불안해 할 때가 있었어.
저 역시도 이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4kg 가까운 우량아로 태어났지만 작은 아이는 어릴 적 어른들이 놀릴 정도로 '엄마 껌딱지'였습니다. 시장이 집이랑 10분 거리도 채 되지 않아 자는 동안 잠시 다녀올라치면 어느새 깨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저를 찾아나서 제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적도 이제는 추억입니다.
너는 곧 깨달았어.
엄마가 당장 보이지 않더라도 금방 너에게 돌아온다는 걸 말이야.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난다는 걸 말이야.
유난스럽게 엄마한테 '코알라'처럼 붙어있던 아이가 유치원이라도 갈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지요. 그런데 웬걸요.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무난하게 유치원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충분'히 붙어있었던 시간 덕분이었을까요. 아이는 '엄마'가 어디 가지 않는 사람이라고 '안심'하는 거 같았습니다.
엄마의 분리불안
그런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존 볼비는 이 관계의 상호작용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아기들은 6~7개월부터 '분리 불안'을 느낀다고 하지만, 사실 돌보는 엄마의 분리 불안은 열 달을 몸에 품었던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그 순간 부터가 아닐까 싶어요. 자신의 일부분이었던 존재를 세상 밖으로 내보냈는데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네가 아기였을 때/ 엄마는 잠든 네 곁을 쉽게 떠나지를 못했어.
떠났다가도 금방 돌아와 다시 네 숨소리를 듣곤 했어.
내가 안 보는 동안 혹시라도 네가 어떻게 될까 봐 겁이 났거든/ 웃기지?
웃기다고 했지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혹독한 진통 끝에 조금 작게 태어난 첫 아이, 설상가상 엄마와 혈액형이 달라 생긴 황달 때문에 형광등 불빛이 형형한 인큐베이터 안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서는 말 그대로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했습니다. 아이가 숨은 제대로 쉬나 확인한 적이 얼마였는지요. 허리 디스크가 올 정도로 아이를 업고 안고 차마 내려놓지 못했지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
네가 유치원 버스를 타고 캠프를 떠난 날, 엄마 마음이 얼마나 허전했는지 몰라.
얼마나 네가 보고 싶었는지 몰라.
함께 아이를 키우던 엄마가 첫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유치원 문 앞에서 하루 종일 엉엉 울었다는 경험담을 토로할 때 여유롭게 웃었지만, 사실 저도 아이가 성장의 단계를 거칠 때마다 '분리 불안'을 혹독하게 겪곤 했습니다. 심지어 큰 아이가 무사히 대학을 입학했을 때도, 작은 아이가 무난하게 직장에 취업을 했을 때도, 남들은 이젠 걱정이 없겠다 했는데 저는 제 가슴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간 것같은 헛헛함에 늘 한동안 헤매였습니다.
사랑하는 아이야,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렴.
날다가 힘들어 쉬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오렴.
엄마가 꼭 안아줄게.
그런데 말이죠, 아이와 '분리불안'을 겪어도 엄마는 '엄마'입니다. 가기 싫다는 아이를 다독여 유치원에 보내는 것도, 그 보다 먼 곳에 기꺼이 보내주는 것도 '엄마'의 몫입니다. 유치원으로, 학교로, 그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아이가 그려나가는 동심원이 점점 더 커져갈 때, 아이의 궤적이 흐트러지지 않게 '엄마'로서 중심을 놓치지 말자고,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는 엄마의 어깨를 다독입니다.
'치유'란 '자기 연민'이 아닐 겁니다. 그저 괜찮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고달프지만 그럼에도 의연하게 삶의 자리를 지킬 힘을 주는 것,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는 그래서 '치유'의 책입니다. 덕분에 떨어져 사는 아들이 '이번 주는 스킵할게요'라는 톡에 '좋은 시간 보내~'라고 여유롭게 답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