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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Oct 06. 2024

구석으로 간 까마귀는 어떻게 되었을까?

- <나의 구석>, <나의 그늘>

2월이 언제였더라, 어느덧 3월도 가고 4월입니다. 봄날이 변덕스럽다더니 일교차가 심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매일 일기 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여전히 3월 하순에도 '나는 꽃샘추위에 취약해'라며 파카를 껴입는 저의 빈약한 체질 덕분이기도 하지만, 화사한 봄볕에 홀려 겨우내 집안에서 동면했던 화분들을 꺼내놨다 얼려죽을 뻔해서입니다. 

그렇다고 대단하게 화분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딸랑 꽃 화분 3개입니다. 그래도 삭막한 겨울, 섭섭치 말라고 번갈아 가며 꽃을 피워 긴 겨울을 함께 나주었던 화분들이었기에 마음이 쓰이네요. 드나들며 눈맞춤을 하던 이 화분들이다 보니 봄볕이 좋으니 너네도 이 볕을 놓칠 수 없지 하다, 아이구 안되겠다 얼어죽을라 하며 들여놨다 내놨다를 벌써 몇 번 째 하고 있는 중입니다. 


겨우 화분인데, 맞아요 꼴랑 화분인데도 마음이 가면 그리 되는 거네요. 그러기에 이르게 피어 꽃샘 추위에 퍼렇게 언 개나리에 마음이 쓰이고, 만개하기도 전에 꽃잎을 뚝뚝 떨꾸는 목련이 아쉽네요. 이런 맘을 알아주는 두 권의 그림책이 있습니다. 바로 조오 작가의 <나의 구석, 웅진주니어, 2020>과 <나의 그늘, 웅진주니어, 2023>입니다. 

'구석'에서 시작된 이야기 

'그림책의 물성'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그림책이란 물체가 가진 성질을 뜻합니다. 도서관에 가서 그림책 서가에 가면 일반적인 글책 서가와 다른 점을 깨닫게 됩니다. 가리런하게 꼿힌 글 책 서가와 달리, 그림책은 마치 자유분방한 유치원 아이들마냥 꼿혀 있습니다. 판형도, 표지와 속지의 질감도, 그리고 제본을 위해 나뉘어진 면의 활용도 제각기, 바로 거기서 '크리에이티브 (creative)'한 매체의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장황하게 그림책의 물성을 설명한 이유는 <나의 구석>이 바로 이 물성을 잘 활용하여 작가의 세계를 펼쳐낸 그림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은 2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2차원의 펼침면 사이에, 주인공 까마귀의 구석이 만들어지며 3차원의 공간감이 생겨납니다. 


자신만의 구석으로 간 까마귀, 아니 자신만의 구석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언제 구석으로 갈까요? 생각해보면, '구석진 곳'이란 말처럼 '구석'이란 단어는 그다지 '긍정적'인 메타포로 다가온 적이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구석진 곳에는 나만이 낑겨있을 수 있는 아늑함이란 '은유'도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요.

무튼 자신만의 구석에서 뒹굴거리던 까마귀가 그 구석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꾸미기 시작합니다. 소파도 놓고, 스탠드도 놓고, 장식장도 놓고, 그리고 화분 하나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저도 작은 화분이 꽃이라도 피워내면 '아이구 장해라'하며 저절로 칭찬이 나오더군요. 까마귀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덧 작은 화분은 까마귀의 유일한 벗이 되어갑니다. 

멀리 있던 벗이 찾아와도 반가운데, 하물며 내 곁의 벗이라니, 까마귀는 화분을 위해 이리 저리 마음을 씁니다. 구석에 조금씩 그려넣기 시작한 노오란 창문, 온 벽이 노오랗게 창문을 그려넣었지만 어쩐지 아쉽습니다. 고심을 하던 까마귀는 드디어, 창문을 그려넣는 걸 넘어, 창문을 만듭니다. 



글자 하나 없이 까마귀의 화분을 위한 '삽질'같은 삽화로 가득한 그림책,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는 많은 걸 반추하게 됩니다. 구석에 창문 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우리에게는 유홍준 교수의 말로 기억되는 조선 정조 때 유한준의 명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그 애틋한 까마귀의 사랑이 구석을 찾아간 까마귀로 하여금 스스로 세상을 향한 창문을 내도록 만들었다는 지점에서 뭉클한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화분을 향한 배려와 고심이 결국 까마귀로 하여금 세상으로 향한 창을 내게 만드는 것으로 <나의 구석>은 마무리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느끼는 바는 저마다 다르겠지요. 저는 타인들의 세상을 떠나 나만의 가정을 꾸리려 했던 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다시 한 발자욱 세상을 향해 나서게 되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구석에서 세상의 그늘로 

그렇다면 까마귀는, 그리고 그의 벗 화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까마귀가 연 창문 밖을 지나던 하얀 새는? 바로 그런 후일담에 대한 궁금증에 답을 해주는 것이 <나의 그늘>입니다. 

작은 화분인 줄 알았는데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 식물, 까마귀는 창문 밖으로 옮겨 심습니다. 하지만 아직 앳된 나무인 식물에게 세상은 가혹합니다. 쏟아진 폭우에 고개를 떨구고 마는 앳된 나무, 까마귀도 마찬가지로 실의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의에 빠진 까마귀 대신 그간 나무 아래에서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던 다른 새들이 나무를 돌봅니다.


덕분에 기사회생한 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가는 건 좋았는데, 그만 그 나무의 뿌리가 까마귀가 만든 구석을 침범합니다. 조금씩 금이 가던 까마귀의 구석이 어느날 그만 나무의 기세에 무너지고 마는데 !

<나의 구석>에서 구석진 방을 온통 노란 벽으로 칠하던 까마귀는 이제 나무를 창문 밖에 심고 난 <나의 그늘>에서는 집 안에 머물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뭇잎을 뜯어먹는 고양이도 쫓아야지, 나무도 돌봐야지, 그리고 나무 그늘에서 쉬기도 해야지. 어느 틈에 까마귀의 공간은 '구석'을 넘어섰어요. 



그래서일까요. 이제 집이 무너져 버린 후 까마귀는 더는 망연자실하지 않습니다. 구석을 부순 건 나무이지만 어쩌면 까마귀는 이제 더 이상 '구석'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일지도요.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데미안>의 문구가 떠오릅니다. 화분을 '성장'시키는 시간이 까마귀 자신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구석을 '파괴'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성숙'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까마귀의 작은 구석에서 자란 나무는 이제 까마귀는 물론, 고양이, 다른 새들에게 그늘을 주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작은 화분을 키우던 까마귀도 이제 자신만의 작은 구석 대신 나무를 의지하여 집을 짓고, 그곳에서 다른 새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화분은 나의 아이일 수도, 나의 일일 수도, 아니 그저 나의 삶일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당신의 화분은 얼마나 자랐나요? 혹시 당신이 머무는 구석에 생긴 균열로 고민하고 계신 건 아닌지요? 지금 당신은 어디에 계세요? 되돌아 보면 애초에 까마귀가 머물 곳은 '구석'이 아니라, 나무 그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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