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결국 브레멘으로 가지 못했다><낡은 타이어의 두 번째 여행>
필라테스 수업에서 스쿼트 100개를 따라했다고 신이 났는데 어김없이 몸살이네요.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습니다. 강사님께 이런저런 질문을 드리면 어머님을 기준으로 하여 답을 주십니다. 어느 틈에 '시니어' 회원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황금도깨비 상을 수상한 루리 작가의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나이든 당나귀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당나귀 씨 이제 운전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죠?
나이듦을 바라보는 사회 이론 대부분은 '노인'을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아닌 '주변인', '타자'의 존재로 바라봅니다. 어느덧 '사회적 하위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연령 계층화 이론'은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그에 따른 태도, 가치, 전망을 가진 노인 집단은 당연히 다른 연령 집단과 구분된다'고 봅니다. '현대화 이론'은 '농경 사회와 달리 산업 사회에서는 노인 역할의 중요성이 감소된다'고 주장하지요.
'사회 교환 이론'으로 가면 보다 적나라하다. '상대방에 대한 보상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 행동에 있어, 노인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교환하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현수, <나는 나답게 나이들기로 했다> 중에서 ) 냉엄한 현실입니다.
바둑이 씨, 야옹이 씨, 꼬꼬댁 씨와 함께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내몰린 나이든 당나귀 씨의 처지가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잘 드러낸다. 나이듦은 '비정규직'과 '일용직'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존심 욕구, 사회적 상호 작용의 욕구, 지적 욕구가 여전해도'(연속성 이론), 사회는 나이든 사람들을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여깁니다.
몸이 안따라주는 저를 '다른' 존재로 바라보는 듯한 선생님의 시선은 사실 아이 엄마들이 저를 '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익숙해진 것입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지레 엄마가 빨간 불에도 길을 건널까 '지청구'를 하는 아들은 그저 '걱정'일 뿐이지만, 그런 생각들이 모여져 사회적으로 나이든 사람들을 '구분'짓게 만듭니다.
어느새 '주류'에서 밀려나버린 '존재', 그런데 '노인'이 다른 사회적 존재들과 좀 다른 건 우리가 살아온 삶의 사이클이 '완료'된 결과로써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자동차와 타이어는 이제 낡을 대로 낡아서
가던 길을 멈춰서야 하는 때를 맞게 되지요
자웨이 작가의 <낡은 타이어의 두 번 째 여행>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낡을 대로 낡아서 가던 길을 멈춰야 할 때', 그건 누군가에겐 '정년 퇴직'일 수도 있고, '은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부인 나에게는 아이들이 훌쩍 자라 더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아등바등댈 것 없는 시간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아껴서 더 많은 것을 '소비'해야 할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굳이 마트의 원 플러스 원 제품을 사야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만 원 묶음으로 사놓은 과일들이 썩어서 버리는 처지가 되었지요.
돌아보면 한 때 자동차와 함께 세상 이곳저곳을 누비던 타이어처럼 잘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한 사이클의 삶에서 이젠 내려서야 할 때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익숙하게 살아온 삶에서 내려서는 게 쉽지 않습니다.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작은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혹독하게 빈둥지 증후군을 앓았습니다. 아이들이 떠나간 자리에 훵하니 찬바람만 들이닥쳤습니다. 그런데 세상마저 우리더러 '늙었다고 선을 긋습니다.' 서러울 밖에.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에서 퇴직 선물이라며 쥐어 준 참치 캔 한 박스를 들고 길을 가던 당나귀 씨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겠지요.
다시 떠난 여행, 누구와, 어디로?
그런데 <낡은 타이어의 두 번 째 여행>에서 타이어는 좀 다른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계속 여행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세상을 더 보고 싶었거든요.
멈춰 선 자동차가 마지막 쉴 곳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타이어는 거기서 튕겨져 나와 혼자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혼자 즐거운 것도 잠시 멀리 가보지도 못하고 커다란 바위에 부딪쳐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버립니다. 여기서 끝일까요? 풀밭에 드러누워버린 타이어에 작은 동물들이 찾아듭니다. 둥지 삼기도 하고, 놀이터 삼아 놀기도 합니다. 비가 와서 물이 고이니 작은 연못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의 당나귀는 어땠을까? 당나귀가 터덜더털 걸어가는 길, 그런데 어느덧 혼자가 아닙니다. 김치 한 통을 가진 바둑이 씨와, 남은 삼각 김밥을 싸들고 온 야옹이 씨, 팔다남은 두부를 가진 꼬꼬댁 씨가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더는 '도둑질'조차 하지 못하게 된 도둑들을 만납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뭐하지?
낙담한 마음으로 모여앉은 이들, 그런데 배가 고프다. 당나귀가 가져온 참치 통조림에, 바둑이가 싸온 김치, 그리고 꼬꼬댁 씨의 두부를 넣어 김치 찌개를 끓여 함께 먹습니다. 맛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이걸로 장사를 하면 어떨까?
책 제목처럼 당나귀 씨, 바둑이 씨, 야옹이 씨, 꼬꼬댁 씨는 브레멘에 가지 못했습니다. 아니 가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대신 당나귀 씨는 친구들과 김치 찌개 장사를 분주하게 준비합니다. 낡은 타이어도 원하던 세상 구경을 맘껏 해보지 못했습니다. 낡은 타이어는 비록 예전처럼 신나게 굴러가지는 못하지만 많은 친구들과 함께 변하는 계절에 맞춰 새로운 세상을 만납니다.
나이듦이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지만 커다란 바위에 부딪쳐 바닥에 드러누워 버린 타이어와 같은 처지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두 권의 그림책 속 주인공들은 더는 예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는 처지에서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벗'들을 만나게 되지요. 나이를 차치하고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요? 두 권의 그림책이 말해주고자 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요?
직장에서 밀려난 당나귀가 만난 바둑이 씨, 야옹이 씨, 그리고 꼬꼬댁 씨, 그리고 자리에 누워버린 타이어에게 찾아든 작은 동물들. 예전처럼 달릴 수 없는 나이듦의 시간에서 우리는 누구와 함께, 어떻게 이 시간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그림책은 '우문현답'을 주고 있습니다. 나이듦의 시간, 더는 예전처럼 사회의 주류가 되어 활기차게 생산적 활동을 할 수도 없고, 그만큼의 체력도 따르지 않는 나이, 과연 우리의 삶을 누구와 함께, 어떻게 꾸려나가야 '브레멘'에 연연하지 않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