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곰씨의 의자>, <거북아 뭐하니?>, <내 안에는 사자가 있어..
라디오에서 새해를 맞이하여 각자의 다짐을 이야기합니다. 하고자 하는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청취자 한 사람이 새해에는 '헐!'이라는 말을 안쓰고 싶다고 말합니다. 맞아요, '헐!'처럼 관성적으로 쓰는 말들이 있지요. 어디 말뿐인가요. 때로는 '관성' 자체가 그대로 내 삶인 듯이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방송을 듣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다면 나는 새해에는 어떤 걸 해볼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도 곰씨처럼
노인경 작가의 <곰씨의 의자>가 떠올랐습니다. 햇살이 좋은 날, 그런 날이면 곰씨는 의자에 앉아 시집을 읽습니다. 차도 한 잔, 거기에 음악을 곁들이면 평화로운 곰씨의 일상이 완성되지요.
그런데 그 평화로운 일상은 그곳을 지나던 지쳐보이는 탐험가 토끼에게 '쉬었다 가시지요'라는 말을 건네며 달라집니다. 평화로운 곰씨의 공간은 흰색과 선의 소묘로 고즈넉하게 표현됐습니다. 반면 곰을 찾아온 토끼는 붉은 색조를 기본으로 하여 생동감넘치는 화려한 색들이 더해졌지요. 완연한 대비, 서로 다른 세계의 만남입니다.
가브리엘레 클리마가 글을 쓰고 자코모 아그넬로 모디카가 그림을 그린 <내 안에는 사자가 있어, 너는?>은 '아이들은 저마다 다르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언제나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쁜 아이'? 토끼입니다. <곰씨의 의자> 속 무용가 토끼도 깡충깡충 춤을 추었다고 쫓겨났대요. 이 책의 곰 아이는 어떨까요? 곰씨처럼 말수가 없네요. 하지만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탄대요.
곰씨도 조용한 일상에 등장한 탐험가 토끼가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에 흠뻑 빠졌어요. 탐험가 토끼와 무용가 토끼가 결혼을 할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지요. 하지만 아이들이 자꾸 태어나고 토끼의 가족들이 매일 곰씨를 찾아오며 여유로웠던 곰씨의 일상이 깨져버립니다.
<내 안에 사자가 있어, 너는>에는 '어흥!', 늘 화가 나있는 것같은 사자 아이도 있고, 뾰족한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같은 아이도 있지요. 그런데 어디 아이들만 그럴까요. 으르렁대고 가시를 잔뜩 세우는 건 어른들이 더 잘하는 거 아닌가요.
곰 아이를 행복하게 하려면 아이 곁에, 그저 가까이에 있어 주라고 책은 알려줍니다. 처방은 다른 듯하지만 저마다 다른 아이들을 '인정'해 주고 기다려주라고 말합니다. 사자 아이가 '으르렁'거리는 시간을, 고슴도치 아이가 가시를 세우는 시간을, 그리고 두더지 아이가 땅 속에서 나올 때까지. 하지만 지금 곰씨도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곰씨는 곰아이가 아닌데 어쩌죠?
<내 안에는 사자가 있어, 너는?>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비법'이 있다면, <곰씨의 의자>에서 곰씨는 힘들지만 스스로 그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보살핌'을 받아야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스스로 자신을 돌보는' 나이가 됐다는 게 아닐까요. 어른이 돼도 우리 안에는 <내 안에는 사자가 있어, 너는?>에 나오는 여러 아이들이 있지요. 하지만 이제 어른이 된 내 안의 아이를 알아주고 돌보아 주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내 몫입니다.
늘 토끼들에 '친절'하게 맞춰줘왔던 곰씨는 그래서 더 힘이 듭니다. 늘 '나'보다 '가족'이라던가, 타인과의 '관계'에 방점을 찍으며 살아왔던 사람이라면 곰씨의 '자중지난'에 공감백배일 것입니다. 사소한 예이지만 저는 함께 먹을 음식을 고를 때마다 식은 땀이 나요. 웬만하면 사람들이 먹고 싶다는 걸 맞추는 편이라, 제게 '선택권'이 주어지는게 난감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음식을 고를 때뿐만이 아니라 매사에 그렇게 살아왔던 건 아닐까요? 곰씨처럼 '음음 어떡하지'하고 혼자 끙끙거리면서요.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난 세상에 다시없는 친절한 곰이라고!' 오죽하면 '착한 ** 컴플렉스'가 있겠어요. '친절'이라는 마스크를 늘 쓰고 살다보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새로 의자를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의자에 '실례'를 하며 에둘러 자신의 맘을 표현하려 하지만 곰씨의 마음이 좀처럼 전달되지 않습니다. 한바탕 앓고 그리고 또 한바탕 울고나서야 비로소 곰씨는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레 털어놓습니다. '그동안 저는 마음이 힘들었어요. 가끔은 혼자있고 싶어요.' 살아가며 우리가 스스로 넘어서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른의 시간
곰씨 못지않게 할 말을 하지 못해서 고전하는 동물이 또 한 마리 있습니다. 최덕규의 그림책 <거북아, 뭐 하니?>의 거북이입니다. 친구를 만나러 가던 거북이가 그만 뒤집혀 버리고 말았어요. 스스로 뒤집으려고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버둥거리던 거북이를 보고 참새가 날아와 물었어요. '거북아, 뭐해?', 그런데 버둥거리던 걸 들킨 게 부끄러운 거북이는 '보면 모르니? 수영 연습하고 있잖아!'하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어요. 당연히 참새는 '열심히 하렴,'하고 날아가 버립니다.
이런 식이예요. 자기를 느림보라 놀렸던 토끼여서, 수다쟁이 원숭이라 소문을 낼까봐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대신 꾀를 냈지요. 먹보 돼지한테 자기 등 뒤에 맛있는 걸 숨겨 놓았다며 코를 들이밀어 뒤집게 만들려고 하거나 악어를 약올려 꼬리에 한 방 맞는 극약 처방을 했어요. 하지만 악어 꼬리에 맞아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또 뒤집어지고 말았어요.
'됐거든!', 막상 두더지가 도와준다고 했는데도 큰 소리를 치던 거북이는 두더지마저 사라지자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다급한 거북이는 목소리를 높입니다. '도와주세요! 거기 누구없나요? 어떻게 됐을까요? 조금 전 그 매몰차게 외면했던 두더지가 /쿵'하고 거북이를 뒤집어 줬습니다. 거북이를 빌어 이야기를 펼쳤지만 '자존'과 '자존심'을 헷갈리며 고전하는 우리의 모습같습니다.
곰씨와 거북이, 서로 다른 이야기일까요? 저에게는 다르지 않게 다가오네요. 친절함이라는 마스크를 벗은 곰씨와 자존심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도움을 청한 거북이는 결국 모두 '나'를 돌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를 잘 돌봐야 '남'과 함께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곰씨의 고백은, 그저 '가끔' 혼자 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더지의 도움으로 머쓱해서 자리를 떠났지만 거북이는 아마 다음에 또 뒤집어지면 조금 더 담백하게 도움을 청하겠죠?
제 새해 다짐은 한 잔의 차와 한 편의 시가 주는 평화로운 일상도 좋지만, 쉽지는 않겠지만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제일 먼저 사랑해주어야 하는 어른인 '나'를 위해 용기를 낼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