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눈덩이의 꿈>
계란 한 판이 된 아들의 뒷머리에 희끗희끗 새치가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 아들, 새치가 다 있네~."
"새치랑 흰 머리랑 다른가?"
"그럼, 새치는 너처럼 머리 전체에 듬성듬성 나는거구, 흰머리는 엄마처럼 앞머리부터 집중적으로 세는 거지.
맞나요? 그저 서른 먹은 아들이 저 흰색 머리칼을 보고 지레 나이 먹었구나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맘에서 갖다 붙인 말입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걸 노골적으로(?) 감지하게 되는 건 언제부터일까요? 아들에게 말했듯이 앞머리가 허얘질 무렵일까요? 수업이 많아서 무릎이 부은 선생님인 친구에게 교수님이 대놓고 이젠 늙었느니 쉬엄쉬엄 하라고 하셨답니다. 이렇게 몸이 내 스케줄을 따라주지 못할 때? 여자라면 '생리'를 '졸업'하거나, 갱년기 증상에 시달리면서? 아님 대놓고 아이들이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말을 하기 시작할 때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남자들 역시 여러 신체적 증상(?) 들과 함께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정년 퇴직'을 할 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의 본원적 수명을 자꾸 갱신하여 이젠 100세를 사는 게 생소하지 않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00세를 향해 살아가야 할 시간이 몇 십년이나 남았지만 오십 즈음부터 남녀를 불문하고 '나이듦'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절감'의 대표적인 감정 중 하나가 '상실감'이 아닐까요. 좁게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넓게는 직장과 사회에서 더는 내가 쓸모있는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육체적 노화와 함께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직장을 가지고, 가족을 이루고 산 이래 힘들고 지쳐도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이루려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육체적 노화와 함께, 이제 더는 그 '무언가'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늙은 나'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어느덧 큰 눈덩이가 되었다
그림책 심리를 배우던 수업에서 '자기 이해'와 관련하여 20여 분의 발표를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제시해주신 그림책이 바로 이재경 작가의 <작은 눈덩이의 꿈>이었습니다. 발제자들은 저마다 이 책에 맞는 대상을 선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 안경'이라고, 저에게 이 책은 '은퇴 즈음의 남성'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나이듦과 상실을 걱정하는 우리지만 사회에 첫 발을 내딜 즈음에는 '작은 눈덩이'에 불과했지요. '멈추지 않고 계속 굴렀기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그림책 속 큰 눈덩이처럼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는 우리에게 멈추지 말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문에 따라 우리는 계속 굴러왔습니다. 하지만 굴러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지요.
구르는 건 쉽지 않았어요.
숲길에서는 나무를 피해 구르느라 힘이 들었고
비탈길에서는 속도가 빨라져 덜컥 겁이 났어요.
비탈길을 구르던 작은 눈덩이는 눈밭에 박히고 머리에 가시가 박히기도 한다. 눈 앞에 나타난 울퉁불퉁한 큰 눈덩이는 '어이, 쪼그만 눈덩이 내 몸에 붙어라,' 그러면 구르지 않고도 큰 눈덩이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뜻한 햇볕 아래 편하게 잠이나 자며 녹아내리자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그림책 속 작은 눈덩이는 그럼에도 눈을 반짝이며 '내 힘으로 굴러야 정말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어,'라며 씩씩하게 굴러갑니다.
아마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도 이러지 않았을까요? 물론 때로는 큰 눈덩이한테 슬쩍 묻어가려 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고, 따뜻한 햇볕 아래 무념무상 녹아내리려 했던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살아오며 부딪친 바위들과 머리에 꼿힌 가지들은 지천이지 않았을까요. 무엇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작은 눈덩이처럼 명확하지 않았던 적이 더 많았을 지도 모릅니다.
내 짧은 강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제겐 사랑하는 선배님이 한 분 계십니다. 제가 이 분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 분이 오랫동안 저와 제 친구에게 맛있는 밥을 사주셨기 때문입니다(일동 웃음).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시고 이제 정년을 맞이하신 선배님은 늘 자신이 직장 생활에 너무 길들여져 인간다운 매력을 잃었다고 안타까워 하십니다.'
하지만 정년 즈음의 선배는 지난 30년 동안 내가 봐왔던 선배의 모습 중 가장 멋졌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오랜 직장 생활로 인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살아온 연륜이 쌓여 중후한 매력이 넘쳤습니다.
꼬마 눈덩이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크고 멋진 눈덩이가 될 수 있어요?"
작은 눈덩이는 깜짝 놀랐어요.
"뭐? 내가 크고 멋지다고?"
작은 눈덩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어요.
"난...........난 계속 굴렀을 뿐이야."
언제까지나 작은 눈덩이인 줄 알았는데 어느 틈에 크고 멋진 눈덩이가 된 것입니다. 나이 들었다며 고개 숙인 우리 자신도 저렇게 크고 멋진 눈덩이가 아닐까요. 주름과 흰 머리만 남은 것같은 우리 삶의 여정이 어느 틈에 우리를 큰 눈덩이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했던 고민과 그 결과물들이 어디 안갔어요. 다 내 안에 있습니다.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말합니다.
'고령화 사회의 근본 문제는 '연금'이 아니다. 은퇴한 이들의 '아이덴티티 identity'다.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확인할 방법을 상실한 이들에게 남겨진 30여 년의 시간은 불안 그 자체다. (중략) 오늘날 아무런 대책없이 수십 년을 견뎌야 하는 '젊은 노인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사회적 존재로써의 삶을 잃어버린 우리는 사실 그 사회적 존재로 살아오며 쌓인 경험의 '큰 눈덩이'입니다. 그 예전 작은 눈덩이가 열심히 굴러 어느덧 큰 눈덩이가 되어 나이듦의 여정에 들어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앞으로 다시 수십 년을 '굴러가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선 나이듦의 출반선에서 '상실' 대신 크고 멋진 눈덩이가 된 자기 자신을 '인정'한다면 앞으로 갈 길이 조금 덜 힘들지 않을까요.
짧은 내 수업은 가회동 집사로 이름을 알린 '빈센트'의 이야기로 끝을 맺었습니다. '가회동 집사'로 다큐의 주인공이 되었던, 68살 빈센트는 네덜란드에 있는 집사 학교에서 최고령 학생으로 또 한번의 도전을 합니다. 그걸 가능케 한건 그가 지난 시간 살아왔던 삶의 신조, 'just do it'입니다. 큰 눈덩이, 이제 당신은 무엇으로 굴러가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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