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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머리 앤 Mar 01. 2024

뱀허물을 손에 쥔 아이

     이민 초기, 난 어린 딸의 친구와 가깝게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노미였다. 밴쿠버에서 처음 내 집을 마련해 막 이삿짐을 들여놓고 있을 때 노미가 엄마의 손을 붙잡고 처음 우리 집을 찾아왔다. 손님 맞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무척 당황해하는 내게 그 모녀는 환한 웃음과 함께 정원에서 꺾은 꽃 한 다발을 내밀며 환영 인사만을 난기고는 곧바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은 쿠키를 만들어 찾아오고 또 다음날도, 그렇게 그 둘은 그날부터 매일같이 우리 집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노미가 그 동네의 유일한 여자애였다. 남자애들만 우글우글한 골목길에 우리가 두 딸을 데리고 이사를 갔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얼마도 지나지 않아 노미는 우리 딸들의 단짝 친구가 되었다. 영어가 서툰 딸들과 어찌 그리 잘 노는지, 아이들 세계에선 언어의 장벽쯤은 아무 문제가 아닌 듯했다.


그날도 노미와 우리 딸들이 집 안팎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노미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난 노미에게 20대인 두 언니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 노미는 늦둥이냐고 물었더니 입양아라고 했다. 속으로 너무 놀라며 내 눈은 얼른 노미를 쫓기 시작했다. 그런 엄청난 비밀을 조심성 없이 저렇게 불쑥 뱉다가 아이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러나..다행히도 노미가 저 멀리 달려가는 걸 보고서야 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그 출생의 비밀을 안 이후로 난 그걸 노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항상 조심했다.


그때 마련했던 우리 집 옆으로는 숲을 따라 긴 산책로가 나 있었는데, 그 길이 노미의 집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정말 특이하게도 그 길 위엔 큰 바위가 하나 있었고, 그 밑엔 기다란 뱀 한 마리와 도마뱀이 한 구멍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노미는 그 둘을 자기가 기르는 애완동물처럼 아꼈고, 그들을 살피느라 상당히 많은 시간을 그 바위 옆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나랑 그 길을 걸을 때면 뱀을 무서워하는 나를 위해 먼저 달려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뱀에게 발로 바닥을 치며 안으로 들어가라고 경고를 했다. 그렇게 6살인 어린 노미에게 보호를 받으며 난 그 길을 함께 걷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미가 하얀 뱀허물을 손바닥에 조심스레 쥔 채 우리 집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너무도 놀란 난 눈을 뎅그렇게 뜨고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적 우리 동네 아이들은 그걸 뱀귀신이라 불렀다. 하얗게 힘없이 누워있지만, 비를 맞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뱀귀신! 그래선지 진짜 비가 온 다음 날이면 밭 옆에 누워있던 뱀허물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난 뱀보다 더 무서운 그 뱀허물을 항상 피해 다녔다. 


그런데 한번은 철없는 남동생이 그걸 주워온 적이 있었다. 그걸 본 엄마는 그대로 달려 나가 동생의 궁둥이를 매몰차게 붙여대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동생은 들고 있던 뱀허물을 마당에 떨구고 말았다. 엄마에게 목덜미가 잡혀 우물가로 끌려간 동생은 열 번도 넘게 비누칠을 해가며 손을 씻어야만 했고, 엄마는 마당에 떨어진 뱀허물을 삽으로 떠 집 밖 어디까지 가 버리고 왔다. 


자기 배 아파 낳은 귀한 장남이 들고 와도 그 정도인데, 친딸도 아닌 노미가 저걸 들고 가면 얼마나 혼이 날까 걱정이 앞섰다. 버리라는 데도 극구 그걸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미를 난 그냥 혼자 보낼 수가 없었다. 따라가서 어떻게든 덜 혼나게 나라도 가서 중재해보지 싶어, 난 급히 딸들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노미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긴장한 채로 부랴부랴 달려간 내 눈앞에 예상외의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노미 엄마가 뱀허물을 보더니, 화를 내기는커녕 되레 활짝 웃으며 집 안으로 잽싸게 달려 들어가 박스를 가지고 뛰어나왔다. 그리곤 뱀허물을 부서지지 않게 그 안에 곱게 눕힌 후 조심스럽게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오라며 손짓하는 그녀의 초대에 얼떨결에 나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둘은 박스를 보관할 장소를 한참을 물색하더니, 안전한 곳을 찾아 그걸 놓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차를 준비할 테니 그동안 노미와 집 구경을 하라고 했다. 그 말에 신이 난 노미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집 안 여기저기로 나를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예상외의 반응에 긴장이 풀렸던 난 어린 노미에게 정신없이 끌려다니다가 가족사진으로 도배가 된 거실 벽 앞에서 다시 한번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가족사진 제일 아래쪽, 딱 노미 키 높이에 그녀의 생모와 생부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러면 노미는 자기가 입양아인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자기 생모가 얼마나 예쁜지를 자랑하는 노미의 높아진 목소리를 들으며, 난 이번엔 또다시 가슴을 졸이며 노미 엄마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노미가 하는 말에 혹시 노미 엄마가 상처받진 않을까?'

그때 흘끗 훔쳐본 노미 엄마의 얼굴은 그저 그런 딸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듯 뿌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 포근한 광경 속에서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된 거라곤 단지, 그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비좁은 내 마음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는 있었지만, 사실 나의 좁쌀만한 마음은 괜히 걱정하고 혼자 눈치 보다가 뒤통수를 크게 한 대 얻어맞고는 속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노미의 양부모는 노미 눈높이에 맞춰 계속 사진을 위로 올려가며 붙여주고 있었다. 생모와 생부의 사진 밑으로 난 쭉 올라오는 못 자국이 그들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 노미와 딸들의 손을 잡고 숲속 오솔길로 산책하러 나갔다. 자기를 키울 수 없는 생모와 생부, 성장하기 위해 자기는 여전히 보살핌과 사랑이 필요한데 친부모가 그걸 못하니, 신이 그걸 대신해 줄 지금의 엄마와 아빠를 자기에게 보내줬다는 노미의 끝없는 재잘거림이 이어졌다. 


그날은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그 아이의 말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줄 수 있었다. 


뱀은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 이미 작아져 버린 뱀허물을 벗는다. 동네 아이들이 줬던 틀린 정보에 내가 잠시 현혹되었던 것일 뿐, 사실 뱀허물은 결코 피해야 할 뱀귀신도 그 무엇도 아닌 그저 벗어버린 작아진 비늘에 불과했다. 노미도 성장하기 위해 벗어버린 과거의 허물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한 뼘 더 성장하기 위해 이제는 내가 허물을 벗을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아이들과 함께 걷던 그 오솔길 한편에 나도 편견이라는 내 허물 하나를 벗어놓고 왔다. 


돌아오는 길은 내가 한 뼘 더 자라선지, 높은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환한 햇살이 훨씬 가깝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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