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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네 글자에 나를 담는 시대

by 달빛소년

[MBTI 뭐예요?]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은 채.


요즘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이에게 혈액형보다 먼저 네 글자를 요구한다.

나는 그 질문에 “ENTP예요”라고 대답했고, 그 사람은 말했다.


“아~ 역시! 말투가 딱 그래요. 저 MBTI 잘 맞춰요.” 이 짧은 대화 속에서 나는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이상하리만치 빠른 연결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서우리만치 가벼운 재단.


MBTI는 어느새 ‘재미’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 이해의 도구, 아니 어쩌면 현대인의 신념 체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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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MBTI를 믿는가?]


MBTI를 통해 사람을 울타리에 넣는 걸 선호하지는 않지만, 요즘은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도 쉽지 않다. 나를 드러내는 순간 ‘약점’이 되는 사회에서 관계에서 계산적 침묵을 선택한다. MBTI는 이런 사회에서 상대에게 나를 소개하는 프로필이다.


첫째, MBTI는 단순해서 편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관계는 넓어졌지만, 깊어지지 않는다. 이름도, 성격도 다 외우기 힘들다. 그때 MBTI가 등장한다. 사람을 딱 16가지로 나누고, 설명서처럼 유형을 붙여준다. ENFP는 활발하고 감성적, ISTJ는 논리적이고 책임감 강함. 이 네 글자는 마치 사용설명서처럼 상대를 이해할 틀을 제공한다. 그 틀 안에 사람을 밀어 넣는 건 위험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효율적이다.


둘째, 나를 설명해 주는 언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너 원래 조용하잖아”라거나 “왜 이렇게 감정적이야?”라고 말할 때, 굉장히 답하기 편하다. “그게 내 MBTI야. ENTP는 원래 그래” 그 말은 곧, “이게 원래의 나야. 받아줘. 이해해 줘”라는 무언의 요청이다. MBTI는 불완전한 자아를 정당화하는 명찰이 된다. 그것이 현실을 도피하거나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가 될 때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한 장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결론이 때론 사람을 살린다.


셋째, 인간은 예측 가능한 관계를 좋아한다.


사람은 누구나 낯선 관계 앞에서 긴장한다.

"이 사람은 나랑 잘 맞을까?",

"이 사람이 갑자기 예민하게 굴면 어떻게 하지?"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예측하려고 한다.

그런데 MBTI는 이 불안을 빠르게 해소시켜 준다.

상대의 성격을 몇 글자로 요약하고, 그에 맞는 대처법까지 알려준다.

"아, 저 사람 T야. 감정 얘기는 피하자."

"저 친구는 E니까 회의 때 먼저 말 시켜줘야겠네."

이건 마치 사회적 매뉴얼처럼 작동한다. 낯선 사람과의 관계를 위험한 모험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게임처럼 만든다.

MBTI는 그래서 심리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너는 불확실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이 4글자만 알면, 안전하게 사람을 다룰 수 있어."

물론, 이건 착각일 수 있다. 사람은 결코 네 글자에 담기지 않지만, 불확실성을 견디기 힘든 현대인은 이 착각이라도 필요로 한다.


[MBTI를 믿는 게 이상한 걸까?]


많은 사람이 말한다.


“MBTI는 심리학적으로 신뢰도가 낮다.”

“공식 검사도 아닌데 왜 믿냐.”

“점성술이랑 뭐가 다르냐.”

“혈액형별 성격이랑 똑같다.”


맞는 말이다. MBTI는 본질적인 성격을 “고정된 유형”으로 나누는 모순을 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네 글자에 집착한다. 왜일까?


아무도 나를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는 나를 직급과 사번으로만 기억하고, 학교는 등급으로만 평가하고, 인간관계는 이미 너무 바쁘다. 그 속에서 나는 단지 ‘무언가로 정의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린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언어가 현대 사회에는 너무 없기에, MBTI는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MBTI는 믿는 게 아니라 ‘말하고 싶은 욕망’이다. 사람들은 MBTI를 맹신하는 게 아니다.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대해 말할 수 있는 안전한 방식을 찾는 것이다. MBTI는 누군가를 낙인찍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누구도 나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않을 때 스스로를 설명하는 최소한의 시도다.


MBTI를 믿는 사람을 비웃기 전에, 그 사람이 그 네 글자 뒤에 숨기고 있는 진짜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가 있다.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MBTI라도 꺼내서 말할 수밖에 없으니까.


MBTI는 부족한 이론이고, 완벽한 도구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이 아니라 공감과 이해를 갈망하는 존재다. MBTI를 믿는 게 유치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나도 이런 사람이야’라는 조심스러운 외침은, 사실 매우 절박하고 인간적이다.


P.S. MBTI가 시들하니 ‘에겐녀?’, ‘테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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