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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되고 싶은 P의 몸부림

by 달빛소년

[계획대로 일하는 건 참 어려워]


나는 언제나 P였다. 계획보다는 흐름을, 틀보다는 자유를 택하는 성향. 늘 마감에 쫓기고, 해야 할 일은 머릿속에서만 웅성거리다 흐지부지 끝나곤 했다. 그래도 그게 나답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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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J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 그 욕망을 느낀 건 회사에서였다.


“계획을 짜서 공유해 주세요’, “일정 맞춰 주세요’, ‘자료는 표 형식으로 정리해서 주세요’

매일같이 들리는 말이었다. 물론 내가 계획을 전혀 세우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말들은 마치 내게 늘 ‘계획이 부족하다’고 못을 박는 듯 들렸다.


그 말들이 매일같이 내 귀를 때렸다. 탁월한 사교성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제가 좀 즉흥적인 스타일이라~”하고 웃어넘기던 것도 잠시, 반복되는 사소한 지적과 눈치 그리고 형편없는 평가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이 조직 안에서 인정받으려면, 문서 하나를 붙잡고 4시간씩 수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결국 이 조직 안에서 인정받으려면, 살아남으려면, 나는 지금의 나로는 부족하다는 걸.


그때부터 몸부림이 시작됐다. 물론, 지금도 버둥거리고 있는 중이다. 회사는 온통 날짜와 계획, 프로세스와 책임감의 세계다. 그게 좋다는 말은 아니다. 가장 최악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날짜와 계획, 회의의 반복이라는 점이다. 결국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나름의 일정표도 만들고, 보고자료 템플릿도 만들고, 회의 전에 미리 문서도 정리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일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일을 잘한다는 것보다 ‘J처럼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


사람들은 이제 내가 ‘정리를 잘하고, 문서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사람이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 말들이 기분 좋았다. 누군가에게 신뢰받는다는 건 생각보다 꽤나 중독적인 경험이었다. 내가 나의 성향을 억누르며 쌓아올린 그 얄팍한 계획성이 조금은 의미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 혼란스러웠다.

계획성과 문서 정리란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보고서와 이슈 없는 일을 깔끔하게 포장해 ‘내 잘못이 아니야’를 입증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J가 되고 싶었던 건 맞는데, 이렇게 ‘되는 척’하면서까지?

분명히 나는 지금도 P다. 생각은 자유롭고, 계획은 자주 흐트러지며, 일정은 늘 감정에 휘둘린다. 다만, 겉모습만 조금 정리됐을 뿐이다. 내가 변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는 변하고 싶은데, 제대로 변하지 못한 채 그저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다.


몸부림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다.

계획대로 하루를 시작하지만 갑자기 변경되는 일정에 무너지기도 하고, 회의 전날 밤에야 겨우 프레젠테이션을 완성하며 ‘왜 나는 늘 이 모양일까’ 자책도 한다.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며 ‘이번엔 다를 거야’ 다짐한 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노력한다.

‘진짜 J가 되면 삶이 좀 더 편해질까?’

‘회사에서 좀 더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 생각 하나로 나는 오늘도 칼같은 일정표를 짜고, 나름대로 프로세스를 그려보며, 내 안의 P를 길들이려고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회사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어떤 날은 성공하고, 어떤 날은 실패한다.

어떤 날은 내가 꽤 J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쯤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건 진짜 J가 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인정받고 싶은 걸까?"

J라는 형식이 아니라, J처럼 보이는 방식이 아니라,

단지 "쟤는 믿고 맡길 수 있어"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 말 한 마디가 필요해서, 그걸 갖기 위해 나는 성향을 비틀고, 습관을 바꾸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로선 너무 낯설고 버거운 방식으로.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나는 나 자신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너 잘하고 있어. 너는 P고, 지금도 P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건 분명 연기는 아니다.

나름의 성장이자 시도다.

나는 아마도, 평생 J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계획보다 감정이 앞설 것이고, 흐름에 맡긴 선택이 더 편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P인 내가 J처럼 살아보려고 애쓴다는 것,

그 노력 하나만으로도 나는 매일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어쩌면 이 몸부림은 나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나를 넓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도,다시 다이어리를 펴고 일정을 정리한다.

그리고 조금은 어지러워지겠지만

다시 또 정리할 것이다.

나는 P다. 그러나,J가 되고 싶은 P다.

그리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P.S. 원래 사람은 쉽게 안 바뀐다. 그래서 오늘도 조금씩 몸부림친다. 그래도 그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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