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크니는 생존 화가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의 하나로 손꼽힙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림에 늘 경배합니다.
호크니의 정신세계를 다룬 마틴 게이퍼드가 쓴 책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를 읽다가, 문득 20여 년 전 이탈리아 여행길에서 내가 일행들에게 푸념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토스카나 최대의 도시 피렌체는 신비로운 매력이 넘치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도시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인정합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로서 걸출한 예술가들을 품고 그들의 작품이 도처에 산재한 이 매력적인 도시를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피렌체는 나에게 무엇인가 불편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많은 기대감을 갖고 이 도시를 둘러보는데 가슴 한 구석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무언가 답답하고 조여 오는 듯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그래서 일행들을 향해 '나는 피렌체가 싫어요'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일행 중에는 유명 건축가와 화가,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느닷없는 이 선언에 어안이 벙벙해진 그들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나는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큰 실언을 하고 말았다는 느낌으로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도록 나는 그 의미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호크니를 통해 명쾌하게 이제야 이유를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중세에 건설된 피렌체는 바둑판 모양의 도로망을 갖추고 조성된 도시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후삼국시대 무렵에 그런 도시를 건설한다고 생각해 보면 얼마나 선진적인 도시설계인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은 한 점에 고정된 소실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의 눈과 시선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소실점에 고정되면 사람도 고정되고 맙니다.
-원근법은 보는 이의 신체를 앗아갑니다. 고정된 점에서 그려지기 때문에 보는 이 역시 고정되고 마는 것이죠. 간단히 말해서 당신은 풍경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문제입니다.
이렇듯 호크니는 그림을 보는 모두를 그림 안으로 초대하고 싶어 합니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야만 현실감과 충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피렌체의 장방형 구조가 내겐 달갑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나는 답답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우리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호크니는 말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호크니는 뉴욕을 싫어합니다. 그는 시각적으로 공간 속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여지를 필요로 합니다.
호크니의 위 그림이 보이지요. <4개의 파란색 의자>라는 그림은 호크니가 조수들과 함께 일하는 공간인 로스앤젤레스 작업장입니다.
이 그림 속의 수많은 의자는 모두 각자의 소실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선이 열리면서 여유 있고 자유롭지 않습니까?
또 하나의 그림은 <산타 모니카 대로>인데요, 차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시선으로 다시 말하면 파노라마 식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하나의 시점에 묶여있지 않으니 움직이는 듯한 활기가 느껴집니다.
호크니 그림과 그의 시점에 관한 견해를 통해서 비로소 20년 전에 품었던 의문을 풀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소실점 때문이었습니다.
게이퍼드는 이 책에서 말했습니다.
-본질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곳을 보는 사람이다.
오늘은 기필코 토스카나에서 나온 명품 와인으로 내 인생 최고의 눈부신 여행이었던 그때를 추억하려 합니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은 단연코 사시카이아입니다.
이탈리아에서 토스카나 지역은 르네상스가 태동한 곳이며 절대 권력의 교회가 통치한 이곳에서 와인은 예술ㆍ종교와 강한 유대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이 지역은 그만큼 중요한 와인 산지입니다. 토스카나를 이탈리아 와인산지의 정수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피에몬테의 와인을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업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브랜드 인지도 면에서 피에몬테는 토스카나에 비교도 되지 않는다. 토스카나가 이탈리아의 보르도라면 피에몬테는 부르고뉴다. 보르도가 세속적이고 상업적이라면 부르고뉴는 양반이나 학자와 같다. 토스카나와 피에몬테도 이와 비슷하다.(이탈리아 와인 가이드에서)
토스카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레드와인 생산지역 세 곳이 몰려 있는 와인 산지입니다. 그 유명한 키안티,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으로 산지오베제 품종으로 와인을 생산합니다. 이 품종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레드와인 품종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토스카나에서 와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슈퍼 투스칸 현상이라는 물결입니다.
슈퍼 투스칸은 토스카나 지역에서 전통적인 방식을 탈피해 만든 와인으로 값비싼 와인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공식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라벨에 따로 명시되지 않습니다.
이 혁명은 한 남자의 전위적 사고와 신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보르도 애호가였던 마리오 인치사 델라 로케타 후작은 가족과 함께 토스카나 지방 리보르노 남쪽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산 구이도 도멘에 정착합니다. 그가 샤토 라피트에서 가져온 보르도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의 묘목을 심으면서부터 와인 양조의혁신이 시작됩니다.
그는 이탈리아 와인법이 정한 품종과 양조법에 얽매이지 않고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신념 하나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 품종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등급을 받을 수 없는 아주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오는 피사에서 공부하던 학창 시절부터 보르도 모델로 기품 있는 와인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졌습니다. 그는 토스카나 볼게리 마을에 있는 자신의 포도원인 테누타 산 구이도 (Tenuta San Guido)에서 훌륭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생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리오는 테누타 산 구이도 포도원의 자갈 토양이 이 품종의 재배에 이상적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1948년 그렇게 사시카이아가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와인은 도저히 마실만한 것이 못된다는 사람들의 악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들만 그의 와인을 마셨습니다. 그러다 마리오는 카베르네 소비뇽의 향에서 자신이 찾던 장엄함을 발견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캐주얼함을 겸비한 이탈리아다운 풍미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이 와인에 '자갈 땅'이란 의미를 지닌 사시카이아(SASSICAIA)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기반으로 한 이 와인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와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68년 빈티지 사시카이아가 시장에 선 보였던 1970년에 통념을 깨는 독창적인 와인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었기 때문에 '비노 다 타볼라'의 최하 등급을 받았습니다. 최하등급의 이 와인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르는 와인입니다. 이탈리아 최초의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숙성된 와인이고, 최초의 이탈리아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이며, 이탈리아 와인으로서는 최초로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받은 와인입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의 고전적인 블랙커런트의 아로마를 허브, 향신료, 가죽향과 함께 풍부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싱싱하고 달콤한 과일과 부드러운 탄닌은 매력적입니다 한마디로 젊고 싱싱한 활기를 가져다주는 와인입니다.
사시카이아가 거둔 엄청난 상업적 성공은1970-80년대 이탈리아 전역의 와인 산지에 혁명적인 품질 혁신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촌스러움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로컬 와인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국제적 스타일을 갖춘 이탈리아 와인으로 세계에 알리는데 공헌했습니다.